우리나라 대학에는 변론부가 있다. 미국 대학에는 토론부가 있다. 겉보기에 우리 대학의 변론부보다는 미국 대학의 토론부가 더 활발한 것 같다.변론과 토론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변론은 「사리를 가려 옳고 그름을 말함」이며,변론대회는 곧 「웅변대회」란 풀이를 덧붙이고 있다. 변론의 뜻은 이 후단의 풀이가 더 잘 나타내는 것 같다. 그것은 일방적인 주장이며 설득이다. 이에 대하여,토론은 「어떤 논제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각각의 의견을 말하며 의논함」이다. 토론은 어디까지나 「각각의 의견」을 전제로 한 쌍방통행인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변론과 토론을 영어낱말로 대비했을때 더욱 뚜렷해진다. 변론이란 말은 영어의 스피치(speech=연설),아규먼트(argument=논의)에 대응한다. 토론은 디스커션(discussion=논의ㆍ검토),디베이트(debate=토론ㆍ논쟁)이겠는데,미국대학 토론부의 토론은 후자,즉 디베이트다. 나는 여기 나타나는 변론과 토론의 차이,대학의 변론부와 토론부의 차이는,그 문화적 뿌리가 깊은 것이며,그 차이가 두나라 정치에도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나는 미국 어느 대학에 들렀다가,모의토론회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외국인 유학생의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기획된 토론부행사였다. 제목은 원자력 발전의 가부. 토론의 진행은 대강 이러했다. 이것이 미국식 디베이트의 일반적인 규칙대로 임은 물론이다.
먼저 「원자력발전은 앞으로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제시된다. 이에 대한 찬ㆍ반 각 3명의 팀이 연단 양쪽 토론대에 오른다. 토론의 순서는 찬성측의 입론과 반대측의 질문,반대측의 입론과 찬성측의 질문,잠시의 작전타임이 있은 뒤 반대측의 반박과 찬성측의 반박. 토론이 끝나자 같은 토론의원인 심판이 양측의 승패를 판정한다. 원자력 발전 반대측이 이겼다. 반대측에서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제시한데 대한 찬성측의 반박이 구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판정의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심판이 있고 승패판정이 있는데서 알 수 있듯,디베이트는 일종의 게임이다. 굳이 말하자면 머리로써 싸우는 스포츠나 다름없다. 그것이 진행되는 양상으로 보아서는 교대로 서브를 넣고,공을 주고 받는 테니스를 닮았다. 테니스처럼 신사적이고 규칙을 지켜야 한다.
디베이트는 신사적이어야 하기 때문에,열변보다는 냉정을 더 평가한다. 냉정하게 입론하고,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하여,논거를 명확하게 해야한다. 그런 뜻에서 디베이트는 어디까지나 논리와 증거의 싸움이다. 그 기본은 재판과 같다.
디베이트는 또 게임이기 때문에,엄격한 규칙이 있어야 성립된다. 감정노출,인신공격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감정노출과 주관적인 발언도 감점이 된다. 이들 규칙의 뼈대가 되는 것은 찬성측의 거증책임과 반대측의 공격책임이다. 찬성측은 입론의 타당성을 객관적 사실로써 증명해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검찰이 범죄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때 반대측은 적극적으로 찬성측의 입론을 무너뜨려야만 이길 수가 있다. 형사재판의 피고인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증책임과 공격책임의 규칙이 양측의 의견차를 부각시키도록 짜여져 있음이다. 토론이란 본디 의견차,「각각의 의견」을 전제로 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의견차를 노출시키고 나서야 합의를 찾을 수가 있고 우열을 가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미국대학의 모의토론회를 참관하면서,나는 그 행사의 뜻을 생각했었다. 그것은 물론 외국인신입생을 위한 청강훈련이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미국식 민주제도,토론문화ㆍ토론정신에 대한 미국사람들 스스로의 자부심이 깔려 있고,외국인 학생들에게 디베이트를 보여주는 것이 미국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시키는 첩경이란 판단을 곁들인 것임직 하기도 했다.
그때 짐작이 얼마나 옳았던지는 몰라도,디베이트라고 영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그런 토론문화가 본래의 우리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의견차를 맞대고 드러내서 우열를 가린다는 것은 우리 심성에 맞지 않는다. 가능한대로 둥굴게,여의치 못해도 양비ㆍ양시로 일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아니면,『글쎄 그렇다니까』『그렇다면 그런줄 알아』의 외마디로,입론도 제대로 않고 토론종결을 선언해 버린다.
이런 풍토의 한 결정을 우리는 지난 임시국회에서 익히 보았다. 그것은 숫제 토론거부와 토론생략이 맞부딪힌 추태였다. 그래놓고는,토론이 없는 곳에 다수결의 원리가 있을 수 없는 줄도 모르는 듯,「다수의 폭력」이니 「소수의 횡포」니를 뇌까린다. 그러면서 국회를 해산하네,못하네,씨알도 먹지 않은 헌법론을 주고 받는다.
그들은 국민이란 토론심판이 있는 줄을 까맣게 잊고 있다. 참 딱한 일이다. 더 딱하기는 이런 글을 백번써봐야 저들에게는 마이동풍ㆍ우이독경일 것이 빤한 것이다. 어쩌다 우리가 마소를 선량이라 뽑은 것일까.
얼마전 교육관계모임에서 원로 한 분을 만났다. 한때 장관을 지낸 분이다. 그는 국회에서 곤욕을 치르던 일을 털어 놓으며 이런 말을 했다.
『국회가 그 꼴 된게 누구 탓이겠나? 우리 교육이 언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다 못 배워서 그리된 것이라면,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
나는 그의 말을 수긍했다. 저들이 못 배워서 그리 된 것이라면,우리 다음 세대라도 바로 가르쳐야지. 그러니,이제라도 토론하는 풍토를 가꾸어야 한다. 토론교육이 있어야 한다. 학교마다 토론부가 생기고 토론게임,디베이트가 성행할 때의 우리국회모습이 달라져 있을 것은 틀림이 없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