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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보선 전 대통령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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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보선 전 대통령 일생

입력
1990.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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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없는 강경」… 세찬 정치역정 한몸에/만석꾼 아들… 영서 수학후 임정에/5ㆍ16 이후 반 박투쟁의 “가시밭길”18일 타계한 윤보선 전대통령은 그의 아호인 해위(바닷가 갈대)가 말해주 듯 20세기 한국 근ㆍ현대사의 세찬 해풍을 온몸으로 확인하면서 험난한 우리 정치역정을 몸으로 기록해온 인물이었다.

해위는 5ㆍ16세력과 가장 직선적으로 대결했던 꿋꿋한 정치인이었고,60년대 야당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는 5ㆍ16세력에 대한 가장 대담한 도전자였으나 대통령시절 5ㆍ16쿠데타를 「양해」 내지 「긍정」했다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일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해위는 비록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불과했지만 4ㆍ19로 일구어낸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제2공화국 붕괴에 일말의 책임을 면키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위는 62년 3월 정정법에 반대,대통령 자리를 물러났고 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민정당을 새로 만들어 5ㆍ16 군정세력에 도전했다. 그는 이 대결에서 결국 패배했으나 전임 대통령이란 후광과 군정반대의 바람을 타고 박정희후보에 15만표 차까지 육박,군정세력의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적극적」 지지를 업고 야당 지도자로서의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됐다. 그는 이때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후 60년대 반군정의 명분을 내걸고 「타협없는 강경」으로 일관했던 해위는 당시 야당에 대 파문을 일으킨 소위 「진산파동」을 이겨내고 67년 박정희후보에 대한 두번째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 선거에서 4년전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2백만표 차로 패배한 뒤 정치일선에서 일단 물러섰다.

그러나 72년 박정희정권이 10월 유신으로 강압정치를 시작하자 해위는 반박정희투쟁을 선언,당시의 야권 인사들을 이끌었으며 74년 민청련 지원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의 구형만 받은 채 자택인 「안국동 8번지」에서의 연금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60년대 민중당 강경파의 정치사랑방이었던 안국동 8번지 해위의 사저는 「재야성 원로정치인」의 회합 장소로 변해 76년 2월의 명동성당사건,79년 10월 YWCA 위장결혼식사건 등 굵직굵직한 정치사건에 자리를 제공해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해위는 마지막 남은 정치역략을 「경쟁과 협력」을 시작한 김영삼ㆍ김대중 두 김씨의 대통령후보단일화 중재에 쏟았으나 김대중씨가 구 신민당입당 포기를 선언,후보단일화가 무망해지자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남으로써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뀐 해인 1897년 8월26일 충남 아산에서 당시 만석꾼의 부호로 개화당일을 맡아보고 있던 부친 윤치소와 역시 만석꾼의 외동딸인 모친 이범숙사이에서 6남3녀의 맏아들로 태어난 해위는 4살때 교군꾼이 끄는 가마를 타고 상경,일출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경응의숙 중등부에 입학한다. 22세때인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들어가며,해방후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ㆍ서울특별시장ㆍ상공부장관을 지내게 된다.

1930년부터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기독교 장로였던 부친의 영향아래 유년시절 세례까지 받은 해위는 6ㆍ25를 겪으면서 커다란 심적 동요를 겪는다. 그는 이같은 비극이 이승만정권에도 큰 원인이 있다고 판단,스스로 이정권과의 결별을 다짐한다. 이로인해 해위는 대한적십자사총재ㆍ상이군인신생회회장 이란 다소 특이한 경력까지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같은 다채로운 이력 때문에 해위는 60년대에 「가장 둥근 정치경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모난 지도자」로 불려지게 된다.

해위 노선은 한마디로 명분을 결코 버리지 않은 선명투쟁이었다. 명분에 따라 일단 잘못된 것으로 규정했을 땐 그는 결코 타협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선거전에서 사상논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한일협정을 매국으로 월남파병을 정치자금 조달을 위한 청부전쟁으로 진단했다. 「박정권은 일본의 괴뢰」란 표현도 서슴지 않았고 『전부냐 전무냐』를 외치며 데모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명분론은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또다른 일면인 신축성을 잃게 했다고 주변인사들은 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50년대 야당지도자 해공 신익희씨나 유석 조병옥씨등이 갖고 있는 폭과 포용력을 찾을 수 없었다고 아쉬워한 사람들이 있다.

「스리버튼」 양복의 품위와 영국식 민주주의에의 갈망,독실한 기독교적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해위의 몸에서는 유교적 모럴의 체취가 더 강하게 풍겼었다는 것이 이제는 고민이 돼버린 윤보선 전대통령과 몸을 부딪쳐본 사람들의 회상이다.<정병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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