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7월17일,박정희대통령의 제24회 제헌절 경축사는 여느 해보다 주목을 끌었다. 그 축사 첫 머리에 밝힌대로,「최근 (7월4일)의 남북공동성명이 가져온 조국통일의 밝은 기대와 신념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뜻 깊은 제헌절」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 경축사에서 박대통령은 「대의제도의 이름으로 비능률을 감수했던 일」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한 일」이 없었느냐고 다그치며,「앞으로 민주제도의 운영이… 더 짜임새 있고 능률적인 것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같은 투의 대통령담화는 이뒤 국군의 날(10월1일),개천절(10월3일),한글날(10월9일)에도 거듭됐다. 이러는 사이 나라 안팎정세의 변전은 숨이 가빴다.
이해 2월이래 3차례 야당이 소집한 임시국회는,여당 민주공화당의 불참으로 공전을 거듭했고,9월 정기국회 무렵에는 진산ㆍ반진산 싸움에 휘말린 야당이 분당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 한편 나라밖에서는,일ㆍ중공수교,공산군우세속의 베트남종전 기운등 해빙과 대결 양상이 엇갈리고 미군철수 문제와 관련된 유엔무대를 비롯한 남북외교전에서 북의 진출이 뚜렷해 지고 있다. 일종의 위기국면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거듭된 말잔치가 10월17일의 「대통령특별선언」으로 귀결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른바 10월 유신은 그렇게 시작이 됐다.
이처럼 7ㆍ4,7ㆍ17,10ㆍ17로 이어졌던 18년전의 소용돌이를 다시 생각할 적마다,나는 그해 여름 공동성명의 밀사 이후락씨로부터 들었던 얘기 한 토막을 상기하곤 한다.
그 해 5월2∼5일 사이 평양을 방문했던 이후락밀사는 귀환을 하루 앞둔 4일 오밤중에 비로소 김일성을 만나 공동성명의 대강을 타결짓는다. 기분이 좋았던지 김일성은 다음날 예정에 없던 점심자리를 마련한다. 이후락밀사의 상대역인 김영주,그의 대리격인 박성철,대남총책 김중린등이 모두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이후락밀사는 당돌한 농담을 했더라고 한다.
『아무래도 평양과 서울,두분사이에는 무슨 비밀전화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와 보니까,곳곳에 자립ㆍ자주ㆍ자위란 표어가 보이던데,저희 대통령께서도 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순간 자리가 서먹해지는 듯 했다. 김일성도 잠시 멈칫하는듯 했으나 곧 소리를 내 웃었다. 그제야 김영주이하 동석자들도 따라웃어 분위기가 풀렸다.
이후락밀사는 저쪽 권력 핵심의 분위기를 설명하느라 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비화라고 할 것도 없는 이 에피소드가 내 머리에 박힌 까닭은 그의 관찰이 예민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전화」의 농담이 절묘하다는데 있다. 이야말로 「농담이 진담 된다」는 속담 그대로인 것 같은 것이다.
다시 18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8∼9월에 걸친 평양과 서울의 제1∼2차 남북적회담은 그런대로 성사가 됐고,10월12일에는 7ㆍ4공동성명에 따른 제1회 남북조절위원장 회의가 판문점에서 열린다.
앞에 적은 「대통령특별선언」의 날벼락은 바로 이 닷새 뒤. 다시 열흘이 지난 10월27일,우리 국무회의는 유신헌법안을 의결ㆍ공고했고,같은 날 평양의 노동당중앙위는 저들의 헌법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음을 발표했다.
12월27일에는 박정희 유신 대통령이 취임하고 동시에 유신헌법이 공포된다. 같은날 북의 새 헌법이 발효되고,다음 날 김일성은 새 헌법이 신설한 공화국주석으로 취임한다.
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동시개헌이 나에게는 하나의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돌릴 수가 있을까. 「비밀전화」의 농담이 새삼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개헌을 7ㆍ4공동성명의 유일한 후과72년 남북대화가 이룩한 「처음이자 마직막인 합작사업」이라고 빈정대는 외국 전문가의 견해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그해 10월6일 박대통령의 방일이 공식발표된 때문이다. 남북대화에 대비하여 우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점에서 그의 방일은 매우 긴요한 것이었고,한일관계사상 처음인 역사적인 의미도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일계획은 10ㆍ17직후인 21일 취소됐다.
이런 경위로 보면,10월6일 현재,10월17일 바로 그 시점의 유신은 예정에 없었다고 해야 옳다. 다만 남북모두가 남북왕래로 빚어진 충격을 보고 위기감을 품었을 것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유신계획이,비상계획으로나마 이미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북의 개헌일정과 맞물려 그 시기에 발동이 됐다고 해야 앞뒤가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목할 것은 박대통령의 방일발표직후,유신선언 직전에 있은 10월12일의 제1회 남북조절위원장 회의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때 남북 동시개헌의 스코어는 북이 단연 앞선다. 저들은 그 무렵 시작된 김정일후계 굳히기와 김일성체제의 완성을 위해,그 시기의 개헌이 필요했다. 이들은 이 작업을 일사불란하게 진행했고,그때 그대로의 체제를 지금껏 이어 온다. 반면 그들의 일사불란에서 위협을 느껴야 했던 이쪽 풍토에서는,그때 개헌이 오히려 불안정과 비극의 씨앗이 됐다.
이런 선후사정을 되짚어 깨닫는 것은,18년전 남북대화는 제법 우리쪽 이니셔티브 아래 시작된 것처럼 기록되고 있지만,실상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대화제안을 하고 밀사를 보낼줄은 알았지만,그로부터 전개될 사태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유신이란 이름의 퇴행도 그처럼 대비가 없었음에서 온 낭패요,헌정사의 오점이라 할 만하다.
이제 남북대화는 그때 이래 새로운 사이클에 접어든다. 그것은 새로운 위기국면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른바 고위당국자회담을 추진하고 기획하는 사람들,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사이에 어느 만큼의 대화가 있는지걱정이 앞선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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