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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계기로 돌아본 69년 동경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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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계기로 돌아본 69년 동경대사건

입력
1990.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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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강당점거… 전학생 유급/「혁명적 개혁」요구… 병원 봉쇄ㆍ수업학생 폭행/경찰,34시간 공방끝에 탈환… 학생들 불질러/신입생 모집중지,만여 지망생 「낭인」신세로【동경=정훈특파원】 재학생 대량유급과 신입생모집 금지라는 최악의 결과를 빚은 세종대사태와 똑같은 사건이 바로 21년전 일본에서도 발생했다. 「야스다(안전)강당 점거사전」으로 유명한 동경대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학생운동을 상징하는 이벤트로서 동경대의 야스다 강당점거사건처럼 처절했던 사건도 없으며 또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사건도 없다.

야스다 강당은 아카몽(적문ㆍ붉은대문)과 더불어 세계의 명문 동경대의 얼굴. 일본의 학생운동은 당시 학생들이 점거하고 있었던 이 야스다강당이 경찰에 의해 함락되자 그 종언을 고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학생운동의 분기점으로서,이제는 캠퍼스의 「상흔」으로서 기록되고 있다.

1년 가까이 학내건물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학생들의 마지막 투쟁거점이었던 야스다강당이 경찰에 의해 「탈환」된 것은 지난 69년 1월19일. 이보다 1년 앞서 동경대는 의학부에서 시작된 학내분쟁으로 학생 12명을 징계조치,사건의 발단을 이룬다. 이들 학생들에 대한 징계는 당시 의학부의 무급수련의 (인턴)들이 수련의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스트라이크에 들어가자 이에 동조한 것이 빌미가 됐는데 교수들은 학생들의 동조를 교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동경대의 모든 과격파학생단체가 한데 모여 「전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를 조직,학교측에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상황은 현재 우리나라의 일부대학과 다름없었다.

특히 이무렵은 월남전의 확대로 일본정부의 대미지원에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피크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의학부 분쟁은 학생들에게 좋은 이슈를 제공한 셈이 된 것.

「전공투」는 학교당국에 대해 「교수의 권위주의 청산」「대학자치권의 확대」 등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개혁을 요구,수업의 방해는 물론 병원의 봉쇄,수업요구 학생들에 대한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교측은 선수습ㆍ후대화를 요구했으나 학생들은 이를 거부,급기야 야스다 강당점거 농성으로 에스컬레이트,학원도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일본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경찰력으로 야스다강당을 탈환키로하고 총 8천5백명의 기동경찰,3백46대의 방석차,4대의 헬기,1만발의 최루탄에 장갑차와 살수차까지 동원,무려 34시간의 공방끝에 농성학생 6백31명을 전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전쟁을 방불케하는 이 격전에서 학생들은 야스다강당에 방화도 서슴지 않았는데 야스다강당의 낙성으로 동경대의 분쟁은 수습의 실마리를 찾았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우선 1년간에 걸친 분규로 수업일수가 부족한 전학생들이 「1년간 유급」이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낳았고 이해 동경대는 3천1백명의 신입생모집을 중지,동경대를 지망하는 고교졸업생 1만명을 「낭인」으로 만들었다.

당시 동경대에 경찰개입의 결단을 내린 사토(좌등) 총리는 동경대에 대해 「관리능력부족」을 선언,『이같은 상황하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라고 정부방침을 설명했는데 이 신입생모집 중지는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조치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는 반대토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이같은 충격요법 없이는 만성적인 학내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의 단호한 의지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또 대부분의 기업들도 비록 동경대생이라 할지라도 졸업생이 아니면 신입사원으로 채용할 수 없다고 정부의 조치를 지원했다.

한편 사법부는 체포된 학생 6백31명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6백10명에 대한 판결에서 1백12명에게 최고 징역 3년까지의 실형을 선고,학생들의 신분을 이탈한 행위에 제재를 가했다.

상처를 받기는 학교당국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당국은 이를 계기로 학생ㆍ교수ㆍ직원들로 이루어진 대학개혁위원회를 구성,동경대가 가지고 있던 권위주의 청산에 노력해 왔는데 교수와 학생간에 언로가 트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사건 이후였다.

동경대는 당시 불바다가 됐던 야스다강당을 학내분쟁의 교훈으로 삼아 수리를 하지 않고 방치해 왔으나 지난해 사건 20주년을 맞아 이를 수리키로 결정,현재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됐다.

또 당시 이래 학부별로 별도로 행해오던 졸업식도 지난해엔 통합졸업식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학생들의 요망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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