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7백명참석 민주적 진행/대의원발언 감정표출없어… 박수로 공감표시/휴식시간엔 파벌모임… 보도진 2천명 취재【모스크바=이장훈특파원】 소공산당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 될 28차 공산당대회가 열린 크렘린궁안의 석조대회의장 건물은 웅장한 외관으로 초행의 방문자를 압도했다. 건물앞 광장의 「28차 소련공산당대회」라고 쓴 거대한 입간판도 아직은 공산당이 권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듯 했다.
건물중심부에 자리잡은 대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선 그 규모와 4천7백여명의 대의원들이 계단식강당과 같이 배열된 좌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철이 든 이후 수십년간 「악의 제국」으로만 알아온 나라에서 「악마와 같은 공산당」의 대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서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누르기 어려웠다.
상오 10시 직전 고르바초프대통령겸 서기장을 선두로 리가초프,야코블레프,메드베데프등 사진과 화면으로 보던 공산당지도부가 대회장측면의 출입문으로 입장했다. 대의원들의 박수속에 꽃으로 장식된 정면단상에 나란히 앉은 지도부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검은색 양복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고르바초프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옆에 앉은 동료와 담소를 나누는 등 여유를 나타내고 있었다.
10시정각 개막선언과 함께 고르바초프서기장이 자리에 앉은채로 사회를 맡았다.
이때 대의원석중간에서 갑자기 한 대의원이 손을 들어 발언신청을 했다. 고르바초프가 『발언하시오』라고 말하자 이 대의원은 『원동(극동)마가단시대의원 브루도프』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식료품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현 정치국원 및 중앙위서기전원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대의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평소 여유만만하던 고르바초프의 얼굴에도 일순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내 『그 문제는 뒤에 토론합시다』고 제안,토론연기여부를 재빨리 표결에 부쳤다.
표결은 좌석마다 설치된 「찬반」 두개의 단추가 있는 자동투표기로 실시됐다. 제한시간 30초내에 단추를 누르면 컴퓨터로 결과가 자동집계돼 대회장 전면에 있는 거대한 멀티비전 스크린에 있는 숫자가 표시됐다. 결과는 고르바초프의 제안이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됐다.
이후 회의는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면서도,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발언권을 신청하면 그대로 받아들여졌고,발언대의원들은 좌석구역마다 설치된 마이크로 조리있게 의견을 개진했다.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란 표현이 있지만,하나같이 논리정연한 언변을 과시했다.
그러나 발언자 모두가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하면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신 공격이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발언에 동조하는 대의원들은 박수로 공감을 표시했다.
4천7백명이 운집한 대회의가 이토록 질서정연하면서도 민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로울 정도였다. 고함과 삿대질,멱살잡이에 발언제지가 난무하는 한국의 「민주주의」,아니면 일사불란한 박수속에 미리 정해진 결론을 추인하고 끝나는 「한국식 정치」가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12시40분 드디어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던 이날 회의의 가장 중요한 순서,고르바초프서기장의 국정보고연설이 시작됐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는 5년전의 27차 소공산당대회에서 장장 5시간동안 기조연설을 감행한 고르바초프를 「15회전을 뛰는 헤비급 권투선수」에 비유했었다.
이날도 고르바초프는 한차례 휴식시간은 있었지만 모두 3시간30분에 걸쳐 서기장으로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국정보고 연설을 했다.
그는 5년전보다는 훨씬 강력한 챔피언인지 모르지만 경제난국과 당의 분열위기등 어느때보다 강력한 「도전자」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달변으로,때로는 손을 쳐 들고 사자후를 토하면서 때로는 좌중을 폭소로 몰고가는 농담을 섞어가면서 그가 「정치의 언어의 마술사」임을 실감케했다.
경제체제전환문제에서부터 당의 진로,개혁의 장래,국방비감축,대외관계등을 차례로 언급한 그의 연설이 계속 되는 동안 대회장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중요대목에서 열광적인 박수로 지지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가 도농간 경제격차를 언급하면서 『농민이 토지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진정한 발전이 어렵다』고 말하자 농촌출신대의원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하오 2시10분 점심식사를 위해 고르바초프의 연설은 일단 중단됐다. 대의원들과 기자들이 식당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와중에 북한 관영중앙통신완장을 찬 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대회장안과 주변에서 취재하고 있는 국내외기자는 무려 2천명이 넘는다고 한 서방기자가 일러주었다.
휴식기간중 각파벌별로 나뉜듯한 대의원들이 별도모임을 갖는 모습도 보였다.
하오 3시40분 속개된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한 사상개혁,당과 지식인들간의 새로운 관계형성,그리고 개혁반대세력으로 인한 당과 국가의 위기상황등을 언급하며 「공산당의 재탄생」을 역설했다.
그의 힘찬 연설은 대회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성의 정치참여를 강조하면서 『지금 이곳에 있는 여성대의원이 몇명이냐』고 물어 여성대의원들이 박수를 치자 『좀더 박수를 크게 치시오』라고 말해 긴장된 분위기를 일순 풀어놓는 재치를 보였다.
이날 회의분위기와 고르바초프연설에 대한 대의원들의 반응등을 종합할때 「공산주의의 아성」 공산당도 결국은 고르바초프란 정치거인의 구상대로 움직이는 듯 했다.
이는 숱한 추측과 곡절에도 불구하고 이 당대회가 고르바초프개혁플랜을 채택하고 끝날 것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첫날 회의막바지에 옆자리의 한 소련기자가 『한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의회회의등을 하느냐』고 물어왔다. 기자는 말꼬리를 흐릴 수 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연설이 끝난뒤 잠시 회의장밖으로 나왔을 때 건물 앞 광장에는 소련인관광객들이 화창한 여름날의 크렘린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