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엄청난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있다. 『밤새 안녕하시냐』더니 하루가 다르게 급변한다.1일 0시를 기해 단행된 동서독의 화폐통합,국경개방을 보고 이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독일인들의 숙원이던 「사람과 돈과 물자」의 자유왕래가 마침내 이루어지고 동독의 운명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치러진 독일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특히 서독국민의 알찬 인내와 천문학적인 재정부담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하나 통일을 목전에 둔 독일을 바라보는 서구각국과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의 시각은 착잡한 듯 하다. 2차대전때 나치독일의 침공을 받은 EC 각국민이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체념속에 앞으로 부상할 강대국 독일에 대해 경계하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소련 역시 통일독일이「나토」에 잔류할 경우를 가정하면서도 서독의 거대한 자본 기술력을 절실히 필요로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지난달 오랜만에 구주지역과 미국등을 돌아보면서 지구촌의 급변동을 실감하고 우리가 처한 위상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요즘 유럽은 동서독의 통일과 함께 EC통합이라는 거창한 대사업을 착실히 추진하고 있었다. 유럽공동체는 오는 92년까지 사람ㆍ물건ㆍ서비스ㆍ자본에 대한 역내의 국경을 철폐하고 「국경없는 유럽」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EC 각국민은 이미 각국 방송채널을 함께 듣고 통화통합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EC의 인구는 3억2천4백만명,국내총생산(GDP)이 4조4천억달러를 넘게되며 무역량은 전세계의 40%에 달하는 단일 거대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문자그대로 제3의 자유주의 경제세력이 탄생하는 꼴이다.
서구각국이 사실상 국가주권을 포기할 92년의 EC통합이 완성되면 「사람 물건 돈」의 이동에 관한 장벽이 철폐된다.
참으로 세계정치의 틀이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하는 형세다. 5년전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했을때 어느 누가 이러한 지각변동을 예단할수 있었을까. 이번 짧은 여행을 통해 동서대립냉전구조의 해빙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를 움직이는 좌표가 다시 유럽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20세기도 앞으로 남은 10년. 21세기의 문턱에서 어느나라건 올바른 방향을 잡지못하면 거센 국제정치의 조류에 떠밀려 낙오되기 십상일것만 같았다.
독일의 통일과 EC통합은 한마디로 국제사회에서의 기득권 포기로 이루어진듯 싶었다. 자국의 이익만을 폐쇄적으로 고수하다가는 현재 의 기득권조차 누릴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리라.
유럽현지에서 전문한 소련의 위기역시,심각한 듯 싶었다. 정치적 위기로는 통독이후 독일의 나토 잔류여부를 놓고 고르비 지도력의 저하를 부인할 수 없는것 같다.
공화국문제의 위기 또한 심각한 듯 하다. 발트 3국의 독립요구에 이어 러시아 공화국의 독자적 행보도 심상한 일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민족문제 때문에 내란이 안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어 보인다.
소련의 경제위기와 소비재부족은 어떤 형태로든 시장경제의 도입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고르비의 외교적 성과는 밖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건만 그가 경제를 잘 모르고 경제를 과소평가한 탓으로 소련경제는 오늘날 스태그플레이션의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소련이 살아남으려면 서방의 자본,기술의 대량도입이 불가피한것 같다.
EC통합 통독을 앞두고 미국의 전략도 괄목할만 했다. 미국은 EC의 거대 단일 시장과 일본의 초경제력에 대항하기 위해 멕시코 등과 단일경제블록을 형성,92년을 목표로 경제통합을 추진 중이다. 그런가 하면 이상비대한 경제대국 일본은 그이상의 원인이 전후 일본을 비군사대국으로 몰아친 연합국때문이었다는 우익적인 논리를 이제 공공연하게 펴게끔 되었다.
이렇게 놀라운 세계의 변화앞에 한국과 한국민은 너무나 도식적인 사고의 패턴속에 안주하며 무감각한 것 같기만 하다. 노고르비 회담으로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과도하게 기대하며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을 꿈꾸고 있다. 한소 접근은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세계의 변화가 가져온 한 징표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는 없을까. 고르비가 「유럽 공통의 집」을 발표한데 이어 언제 자국의 필요에 따라 「아시아 공통의 집」구상을 내던질지 모를 일이다.
바깥세상이 이런데 우리 국내 판세는 어떤가. 집권당이 장기집권 구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이나 운위하고 「6ㆍ29」재선전으로 민심이나 얻으려 급급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기업가는 기업의욕을 상실하고 있다. 지금 유럽에서는 한국상품이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고 열악해져 도처에서 일본상품에 밀려나는 판이다. 주가는 계속 하락,7백10선을 하회하며 경기는 후퇴한 가운데 물가는 오르고 있다.
민생치안은 단속,엄벌이라는 구두선만으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면하나 성한곳이 없다. 남미형 국가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이런게 바로 남미로 가는 과정이 아닌지,걱정이 앞선다. 우리사회,우리국민도 서구의 본을 따 기득권을 대담하게 표기하고 심기일전해서 힘을 쏟지않고서는 전도가 캄캄하다. 가진자는 물론이요,근로자 대학생들도 목소리를 줄이는 자제가 필요할줄 안다.
통일을 해야 한다고 입으로만 되뇌일 일이 아니라 힘을 키운 서독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서울올림픽의 감격적인 성공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제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왔다는 감회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소감이다.〈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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