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기틀 마련… 갈등분출도 늘어6공화국의 생성과 존립근거라 할 수 있는 「6ㆍ29선언」이 29일로 3주년을 맞았다. 87년 당시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핵심으로 하여 8개항으로된 「6ㆍ29선언」은 선언의 주체와 배경 등에 관해 지금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국민의 전체적인 여론을 받아들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선언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대통령선거에서 승리,집권중반기를 맞고 있으며 6공정부의 정책또한 「6ㆍ29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6ㆍ29선언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제반분야의 민주화추구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6ㆍ29선언은 권위주의체제 청산과 민주화확대 등 사회제반분야에 상당히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지만 부정적요인 또한 적지않다는 지적도 있다. 「6ㆍ29선언」 3주년을 맞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4개분야별로 그 공과와 선언의 현주소를 점검해 본다.
◎정치분야/북방결실ㆍ내정불안 명암/5공고리서 갈등… 내각제설로 논란시발
6공정부는 수많은 과제중에서 숙명적으로 세가지의 숙제를 안고 출범했다. 이는 6ㆍ29선언 3주년에 대한 총체적 평가의 기준이 된다. 6ㆍ29선언이 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민주화의 진전이 그 첫째이며 5공과의 단절이 둘째이며 스스로 굴레를 쓴 「중간평가」가 세번째 과제이다.
6ㆍ29이후 6공정부는 엄청난 변화와 도전속에 40여년간 누적돼온 권위주의체제의 「고리」를 풀어 표면적으로는 「민주화의 대장정」을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민주화 과정에서 각계각층의 누적된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이를 여과하지 못해 한편으론 국력의 낭비와 혼란을 겪기도 했다. 다시말해 민주화는 권위주의 배제등을 통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사회기강의 해이ㆍ무질서ㆍ가치관의 혼돈 등 역기능을 낳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6공 출범후 2년여동안 정치권과 국민들간에 지루한 소모전을 거듭해온 5공청산문제는 작년말 「12ㆍ15대타협」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국회증언대에 섬으로써 과거청산의 큰줄기는 정치적으로 매듭된 셈이다.그러나 광주보상법 제정등 후속조치는 아직까지도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여서 정치권내에서 논란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6공은 출범후 2년동안 5공청산과 중간평가라는 두가지의 정치적 「멍에」를 벗기위해 국력을 소모했고 6ㆍ29선언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여소야대 정국구도에 얽매여 민생현안을 뒷전으로 미룬채 정치권의 무력증만 확산시켰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6공의 한 축을 이루었던 구민정당은 4ㆍ26총선 참패후 무력감에 빠져 내홍상태까지 보였고 권력상층부의 이러한 현상은 일선행정기관에 까지 파급됐다.
그러나 6공은 지난 2년간 동서화합의 대제전인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쳤고 40년분단에 한획을 긋는 획기적인 북방정책과 남북한 관계개선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노대통령은 취임후 북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동구권 대다수국가와의 수교 및 한소 정상회담을 실현함으로써 북방외교의 「종착역」인 통일의 포석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북방외교의 결실은 「한반도 평화구상」의 가시화라는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3당 통합이후 증폭되고 있는 내정의 불안이 지속되면서 빛을 바래고 있는데다 이를 향후정국구도에 연계시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부정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3년전 권력내부의 혁명으로 사회제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6ㆍ29선언의 요체는 대통령직선제였다. 그러나 불과 3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권력상층부가 이를 「전면부정」하는 내각제개헌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6ㆍ29선언이 지난 8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선거전술에 불과했다는 「자기부정」의 결과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함께 「명예혁명」이라고 규정한 3당통합도 「정국안정」을 도모한다는 취지 대신 오히려 여권내부의 갈등과 정국불안을 야기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6공은 6ㆍ29선언을 바탕으로 국정전반 및 사회각분야에 많은 변화를 유도,민주화의 기틀을 구축했으나 정치행태는 「관망과 수속의 정치」라고 표현되듯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불안감과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따라서 6ㆍ29선언 3주년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는 이처럼 명암이 엇갈리고 있으며 선언의 핵심요제인 권력구조문제가 주체세력에 의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조명구기자〉
◎경제분야/「자율ㆍ공정」개혁의지 쇠퇴/증시침체ㆍ국제수지 적자ㆍ물가고 등 암영
「6ㆍ29」정신은 경제분야에서는 「경제민주화」추구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지난 88년 6월 경제기획원이 펴낸 「우리 경제의 현황과 과제」라는 책자에 따르면 경제민주화는 가계ㆍ기업 등 모든 경제주체가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자율ㆍ공정ㆍ균형의 경제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소위 「선진화합경제」를 지향하는 경제민주화의 배경은 무엇보다 지난 60년대 이후 정부주도형 압축성장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적정분배를 미뤄온 면이 적지 않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특히 근로자 농어민 도시저소득층 등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는 계층이 형평분배를 강력히 요구,이들의 불만으로 빚어진 사회적 갈등때문에 우리경제는 더이상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따라서 6공정부가 ▲자율의 내용으로 정부규제완화,금리자율화,중앙은행독립 ▲공정방안으로 세제개편,금융실명제,토지공개념 ▲균형확대를 위해 지방경제육성,서해안개발,농어촌발전계획 등을 추진케 된 것은 경제사적인 발전논리로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6공이 중반기에 접어든 현재 시점에서 볼때 자율ㆍ공정ㆍ균형으로 집약된 경제개혁의지는 크게 빛이 바랜 느낌을 주고 있다.
형평과세로 부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확보하려던 노력은 금융실명제 유보를 계기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
한때 경제각료들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체제유지비」차원에서 가진 자들이 실명제등 제도개혁에 호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여소야대 국회에서 무모한 인기영합 끝에 통과된 종합토지세가 지난해 고지서 한번 내보내지 못한채 다시한번 개정되는 시련을 겪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6공 정부가 그렇듯 외쳐온 경제정의에 대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종토세 재개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뒤이은 금융실명제 유보가 동일한 흐름을 탄 것이며 나아가 어쩌면 여소야대 국회때문에 입안이 가능했던 토지공개념 관련 3개법안조차 종토세처럼 재개정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6공이 공약으로 내세웠다 흐지부지 현실과 타협했거나 경제여건 변화를 이유로 포기한 정책은 이밖에도 많다.
증시의 주식수급 동향을 정확히 예측치못해 주가폭락에 결과적으로 일조한 국민주 보급이 그러하며 금융부문자율ㆍ공정의 핵심격인 중앙은행 독립문제도 관료집단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됐다.
중앙은행의 통화가치 수호 기능을 중시하는 일부 학자들은 『한은독립이 이뤄졌다면 지난 연말 3조원 가까이 돈을 퍼붓고도 증시부양에 실패,최근의 물가고를 더욱 부채질하는 식의 통화운용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경제위기로까지 거론되던 경기침체는 물론 호황과 불황이 엇갈리는 시장경제 속성상 불가피한 면이 크다. 그렇지만 86∼89년 4년간 국제수지 흑자를 끝으로 올들어 다시 적자회귀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실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총 3백50억달러에 가까운 경상수지 흑자를 기술 및 인력개발 등 새로운 도약의 거름으로 쓰기보다 기업은 재테크,서민은 과소비로 흥청망청 쓰도록 내버려 둔 것은 정책부재의 결과다.
최근 물가고에 시달린 일부 국민들이 『차라리 5공땐 물가걱정은 안했다』는 넋두리로 들리지만 정부는 그럴수록 의연히 「안정속 개혁」을 부르짖던 출범초기를 곰곰히 되씹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유석기기자〉
◎사회분야/「인권」제도 개선ㆍ운영 미흡/욕구폭발에 공권력대응… 민생치안 구멍
6ㆍ29선언에 제시된 8가지중 사회분야와 직결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 ▲언론자유창달 ▲자치와 자율의 보장 ▲밝고 맑은 사회건설 등 4가지로 요약된다. 이들 4가지는 우리 사회가 오랜 권위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되도록 해보겠다는 약속이었다.
6ㆍ29선언 3년을 맞은 오늘 우리사회는 분명히 개선은 됐으나 총체적으로 볼 때 기대치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일반국민들의 평가이다.
그 원인은 6ㆍ29당시의 개혁정신이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됐고 제도개선이 실제 운용상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오랜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난 국민들의 욕구분출이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밝고 맑은 사회건설」의 경우 과감한 사회정화조치,폭력배소탕,강ㆍ절도사범 철저단속,서민생활 침해사범 척결 및 우리사회의 고질적 비리와 모순시정이 당면과제로 제시됐으나 국민들은 종전보다 더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으며 공직자들의 비리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인신매매 조직폭력 강도살인 강간 등의 각종 흉악범죄는 권위주의체제의 붕괴로 인한 사회통제력 이완을 틈타 발호하기 시작,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을 의심케 할 정도가 돼버렸다. 또 관직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 전근대적 존경과 신망이 붕괴된 상황에서 공직자들은 방황하고 있으며 직업윤리를 확립하지 못한채 무사안일차원을 넘은 만성적 비리에 길들여져 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인권존중과 자치ㆍ자율의 신장은 과거에 비해 개선됐다고 평가받을 수 있으나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아있다.
6공 정부는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보다 더 인내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특히 학원과 노사문제에서 잇따른 공권력투입 처방으로 질서회복을 꾀하곤 했다. 사태의 본질문제 해결을 원하는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채 그때 그때 즉응적인 태도로 급한 불을 꺼온 것이다.
구속적부심제도가 부활되고 영장없는 임의동행 관행이 줄어든 것은 획기적인 일이지만 실제 운용과정은 아직도 구태의연해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문제도 사안별로 실랑이가 벌어질만큼 당연한 인권보장 조치들이 여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태다.
「언론자유의 창달」은 언론기본법 폐지와 주재기자부활,프레스카드제 폐지 등 가시적 조치가 취해졌고 지면증면등 언론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계속돼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무한경쟁 자율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되살아난 사이비 언론등 과도기적 현상과 국가안보를 내세운 언론간여 현상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이 언론내외부의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6ㆍ29정신이 사회전반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영향은 바로 권위주의의 퇴장과 개방과 자율의 등장이다.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대결과 긴장의 국면속에서도 탈권위주의 의식이 사회집단속에서 광범위하게 자리잡아가고 있고 합리와 효율이 행정과 직장에서 가치를 높여가며 인정받고 있다.
이같은 보편적인 시민의식의 변화부분이야말로 가장 6ㆍ29적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사회총체적으로 볼 때 6ㆍ29의 중간평가는 대전환으로서의 기대치에는 미흡하나 점차적으로 파급되고 수용돼가고 있는 단계라고 봐야할 것 같다.〈한기봉기자〉
◎문화분야/활동공간 확장… 이념숨통/문화부독립 괄목… 출판선 「사법대응」늘어
6ㆍ29선언은 우리사회의 다른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ㆍ예술 영역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6ㆍ29선언의 의미와 평가를 놓고 전리품으로 보려는 재야나 민중쪽의 시각과 시혜품으로 생각하는 통치권의 시각이 서로 엇갈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같은 견해차이에도 불구하고 6ㆍ29선언은 문화ㆍ예술분야의 합법적 활동공간을 확장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화ㆍ예술의 모든 영역에 걸쳐 체제수호나 통치권차원서 극단적인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던 반체제나 민중논리 또는 이데올로기 문제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 또는 묵인되고 있으며 월북문인ㆍ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대적인 해금조치도 이뤄졌다.
이같은 흐름속에 전개되고 있는 6공의 문화정책 가운데 문화부의 분리독립과 북방문화교류 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 언론 학술 출판 등 일부 분야는 우려의 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올들어 신설된 문화부의 출범은 가장 큰 변화이자 결실로 꼽히고 있다. 해방이후 크게는 정치 경제,작게는 공보행정의 뒷전에 밀려 액세서리 역할에 머물러야 했던 문화행정이 제자리를 찾고 문화예술의 진흥에 필요한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당초 기대에는 못미쳐도 문화부의 관장 범위도 확대됐다. 도서관행정과 예술원업무가 문교부로부터 이관됐으며 문화의 생활화와 대중화작업을 겨냥한 준비도 갖춰졌다.
올림픽이후 급속하게 팽창되고 있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문화교류는 해방이후 반세기 가까이 막혀왔던 동구권문화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동구권 연주자나 공연단체의 내한 공연은 우리 문화ㆍ예술계에 상당한 자극을 주기도 했지만 무분별하고도 일방적인 문화유입은 앞으로 해결돼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활발한 동구권과의 문화교류와는 달리 북한과의 교류를 겨냥하고 대비하는 움직임은 아직 미미할 뿐이다. 이는 물론 북한측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공감대가 국민들간에 형성되고 있으면서도 교류의 길을 트기 위한 정부의 보다 능동적인 노력이 아쉽다는 것이 여론이다.
무엇보다 문화ㆍ예술분야가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 우선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같은 여론은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언론 자유문제에 있어서는 6ㆍ29선언 이후 언론사의 노조결성등 다소 나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방송의 경우 정부의 주도로 민방허용 케이블TV 시범실시등 기존의 방송구조를 뒤흔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같은 방송구조 개편작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방송의 내용에 있어서는 뉴스의 공정성이 회복되고 금기시돼왔던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는 특집들의 제작,방영이 이뤄진 점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반공과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숨통이 막혀 있던 사회변혁논리 등 다양한 좌파이론들이 다소 숨쉴 공간을 확보했으면서도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5공시절보다 후퇴한 점도 없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여론은 진보적 학술연구자들이나 출판분야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와 금년초 잇달아 진보적 학술연구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으며 출판의 경우에는 6ㆍ29선언 이전보다 오히려 희생자가 더욱 많은 실정이다. 이들은 주로 이념도서와 관련돼 있는데 6ㆍ29 이전에는 문공부의 일방적인 압수수색에 의존해 왔으나 6공 들어서는 국가보안법을 적용,사법적 제재를 받고 있는 점이 다르다.〈이기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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