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꼭 40년이 됐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그날을 해마다 6월이면 어쩔 수 없이 되씹게된 지도 10년을 네번이나 지났다.6ㆍ25 비극의 의미는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90년의 6월처럼 그 비극이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안팎으로 새로운 상황,아마도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변화가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동서 냉전구조가 와해되고,냉전이 청산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6ㆍ25전쟁이 냉전의 산물이요,동시에 이땅을 냉전의 최전선으로 만든 비극적 사건이었던 만큼 냉전청산이란 바로 우리 자신과 관련된 역사적 흐름인 것이다.
사실상 적대관계에 있었던 서울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이제 정식국교관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교류관계가 시도되고 있다. 우리와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중국도 이미 상당한 규모의 경제교류를 쌓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바로 우리 사회내부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을 6ㆍ25전쟁 40년만에 실감하게 됐다. 국제정세의 변화가 엄청난 규모의 변화라면,그것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바로 우리 피부에 와닿는 구체적 변화다.
그동안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6ㆍ25전쟁이 남쪽으로부터 도발됐다는 소위 「북침설」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전쟁의 경과를 보더라도 상식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이 「억지」가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이어서 「민족해방전쟁론」의 주장이 나왔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서울과의 사이에 길을 트면서 「북침설」의 억지 신화는 더 이상 설땅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90년의 6월은 소련 스스로 스탈린시대의 유산청산을 위해 6ㆍ25가 김일성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이었음을 단정적으로 밝힌 해로 기억될 것이다.
최근 서울을 방문했던 소련공군의 퇴역장성은 6ㆍ25전쟁에 소련공군이 참여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한 해방이후 6ㆍ25 전쟁기간동안 북한정권에 참여했던 고위급 인사들도 텔리비전 카메라앞에서 6ㆍ25가 김일성에 의해 어떻게 꾸며졌던가를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지금은 김일성 비판운동과 관련돼 소련에 망명중인 이들중 한 사람은 김일성이 6ㆍ25의 동족상잔을 도발했다는 것은 세계에서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고 단정했다.
이제 비로소 확인된 또 하나의 사실은 6ㆍ25전쟁이 스탈린시대 소련과 관련되는 「대리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당연한 상식이다. 하지만 당연한 상식이 외면된 채 「민족해방전쟁」으로 미화됐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90년 6월에 확인된 것중 가장 값진 사실은 6ㆍ25전쟁과 같은 전쟁이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우리의 결의다. 그것이 김일성의 주장대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하더라도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6ㆍ25전쟁은 남북 합쳐 3백만 가까운 목숨을 빼앗았고,남쪽에서만 30여만의 전쟁미망인,30만의 불구자,10여만의 고아,1백여만의 결핵환자,5백만의 피난민을 낸 비극적 전쟁이었다. 그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요 범죄행위다.
유럽대륙을 무대로 해서 동서는 지금 냉전체제의 해체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40년전 김일성이 저질렀던 비극적 전쟁놀음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에는 아직도 전쟁체제가 「어버이 수령」의 이름아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유지되고 있다.
6ㆍ25 40년째인 오늘 우리는 이땅에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평화의 탑을 쌓아올릴 결의를 다짐하자. 40년이 지나도록,그리고 세계가 대결을 청산하고 화해를 서두르는 커다란 물결을 타고 있는 이때까지 「전쟁체제」를 강화ㆍ유지하고 있는 평양이 대세앞에 눈뜨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를 위해 평화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그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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