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백서」집필 군사사연구소장 볼코고노프증언/“소,「모의 티토화」우려 남침승인”/중국견제용 「소 영향하 통일한국」필요/참전으로 중국고립화… 소 의존 불가피/소,49년까진 “미 참전 가능성”전면전 주저/중국선 소 만주개입 저지위해 참전결정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한국전의 성격규명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조영환교수(미애리조나대ㆍ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는 23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자체 세미나에서 한국전이 소련과 중국간의 뿌리깊은 상호불신으로 유발되었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조교수는 스탈린평전을 집필한 소련의 저명한 역사학자와의 면담을 통해 스탈린이 모택동의 티토화를 우려한 나머지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했으며,한반도를 대중국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는 애초의 전략적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처음 소개했다. 다음은 조교수의 발표내용 요약이다.【편집자주】
한국전은 과연 누가 왜 일으켰는가.
40년전에 발발한 이 전쟁의 직접책임자에 대해 아직까지도 동서양진영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정설은 없다.
한국전의 발발원인에 대해 소련ㆍ중국ㆍ북한의 공식적 주장은 최근까지도 「미국의 음모에 따른 북침」이란 틀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북침에 따른 반격」이었음을 주장해 왔다.
중국은 국무부고문이었던 존ㆍ포스터ㆍ덜레스가 전쟁을 계획했으며,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맥아더때문이었다고 책임의 대부분을 미국에 돌리고 있다. 89년 6월부터 소련군의 한국전 참전사실을 밝히는 등 6ㆍ25당시의 일부 「진실」들을 공개하기 시작한 소련도 아직 공식적으로 북침주장을 철회하는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올해 4월20일 모스크바 방송이 스미르노프라는 학자와의 대담을 통해 「한국전쟁이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다」고 보도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학자의 견해일뿐 소련의 공식적 견해라고는 볼 수 없다.
공모인설,내인설,북침설을 막론하고 모두가 여전히 가설의 형태로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소련의 1차자료를 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교수는 최근 소련이 6ㆍ25의 진실을 부분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기존의 북침주장을 철회하기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분석한다. 소련은 현재 91년 발간을 목표로 「한국전백서」를 준비중에 있다. 이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은 소련군 현역육군대장이자 역사학박사인 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장 드미트리ㆍ볼코고노프이다.
조교수는 87년 핀란드 군사학회세미나에서 볼코고노프장군을 처음 만난이후 지금까지 3차례 만나 한국전에 관련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고르바초프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평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기밀서류를 직접 열람했으며,스탈린당시의 주요인사 수천명을 접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89년말 4권으로 완성된 스탈린 평전의 한국전관계부문은 극히 빈약했다. 북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올해 초 만났을 때 볼코고노프장군은 92년 발간예정인 「한국전백서」가 91년 발간으로 1년 앞당겨졌다며 『이제 더이상 북한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밝혀 그동안 소련의 공식적 입장이었던 북침주장이 번복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볼코고노프장군의 증언과 스탈린 평전을 종합해 볼때 조교수는 남침을 주장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었고,북한의 전쟁준비를 일찍부터 지원해 왔던 소련이지만 49년말까지도 미국의 개입을 우려,전면전을 주저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개전요청을 수락,남침에 동의한 것은 모택동의 「티토화」를 우려한 때문이었다는 것이 볼코고노프장군의 견해였다.
스탈린이 남침을 주저한 것은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스탈린은 국내문제와 동유럽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대규모전쟁을 원치 않았으며,남침이 미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을 무엇보다도 우려했다.
스탈린의 자세에 변화가 생긴 것은 49년 12월16일부터 50년 2월14일까지 근 2개월동안 계속되었던 모택동과의 회담이 계기가 된다. 모택동의 소련방문으로 이루어진 중소정상회담에서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돼 표면상으로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두정상간의 관계는 극도로 험악했다고 볼코고노프장군은 주장한다. 모택동은 만주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일체 들어주지 않았다. 모택동은 소련의 조차지였던 여순ㆍ대운항의 반환은 물론 만주지역에서의 소련의 기득권이익을 모두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45년이후 만주에서 뜯어간 시설의 보상명목으로 3억달러의 원조를 요구,스탈린을 격분케 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강력한 중국이 탄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특히 모택동이 중국을 완전장악하는데 우려를 느껴왔다. 중공군이 양자강도하작전을 준비중일때 미국의 개입이 우려된다며 이를 제지한 것도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통해 모가 조만간 티토화할 것이라는 의혹에 확신을 갖게 됐다는 것이 볼코고노프장군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자노선을 걷게 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영향하에 있는 「통일된 한국」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계산에 따라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볼코고노프장군은 50년 2월에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이 3자회담을 가졌다는 「공모설」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모택동이 모스크바를 떠난 뒤에야 김일성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소회담에서는 한반도문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해볼때 스탈린이 남침계획을 통보한 것은 김일성과의 회담이후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이 이에 동의한 것은 스탈린의 요구를 전면 거부한데 대한 일종의 「보상」을 줄 필요를 느꼈다는 측면과 함께 북한에 대한 지원이 조선인 의용군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판단했던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소련에서 새롭게 나오고 있는 자료를 살펴볼때 소중북한이 공모해 한국전을 도발했다는 이른바 3자공모설은 중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
오히려 한국전발발의 배경에는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큰 역할을 했다는 새로운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
수정주의학설에도 「수정」되어야할 점이 있다. 남침유도설의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애치슨선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치슨선언은 미국의 방위선으로부터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지만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이관한다는 대안이 제시돼 있었던 반면,대만문제에는 아무런 대안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을 주목해 볼 때 미국국무부는 중국을 「티토화」하기 위해 이러한 선언을 내놨다고 추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중국은 45년 6월부터 49년 3월까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비밀접촉을 수차례 시도한바 있다.
따라서 애치슨선언에서 한국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이 선언이 노린것은 중국에 대한 호의적 메시지였다. 국무부가 이처럼 모호한 메시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국민당정부포기에 따른 국내여론의 비등을 감안한 때문이었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애치슨선언은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계략」의 증거로서 제시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상을 종합해 볼때 한국전의 발발원인으로 중소간의 뿌리깊은 상호불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조교수는 말한다. 또한 한국전 진행과정에서 중소간의 갈등은 증폭됐으며 이것이 중소간의 이념분쟁의 근본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소련은 전략적 목표를 부분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중국의 참전으로 소련이 45년이후 북한에 대해 누려왔던 지배적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한 것은 사실이었지만,미국과 중국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들어서게 됐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손실은 미미한 것이었다. 중국은 한민족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최대피해자였다.
인적ㆍ물적손실은 말할것도 없고 대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상실해 버렸다. 침략자로 낙인찍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바람에 원치는 않았지만 상당기간 소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도 중국못지않은 불이익을 감수했다. 국무부를 중심으로 모택동을 티토화하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그것은 72년 닉슨의 중국방문때까지 시도되지 못했다.
한국전은 국내적으로 또 미국에는 이데올로기전쟁이었지만 소련ㆍ중국에게는 패권장악을 위한 전쟁이었다.
김일성은 남한지역을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소련은 이데올로기적 목적보다는 동맹국이었던 통일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승인했다. 미국이 참전하고 압록강변까지 확전시키는 과정에는 이데올로기적 고려만이 중시되었다. 6ㆍ25발발전까지 동북아에서 병행추진되던 세력균형을 노린 고려는 아예 무시됐다는 것이다.
중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은 자국의 안보가 1차적 목표였다. 또한 만주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갓 출범한 국가의 운명을 걸고 한국전에 참전했던 것이다. 소련의 「한국전백서」가 나오고 중국에서도 역시 새로운 자료가 공개될 때 한국전의 성격은 보다 분명하게 규명될 수 있으리라고 조교수는 기대하고 있다.【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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