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률 5천분의 1”인천상륙작전/미합참 「제자지휘부」설득 강행/북한도 경시… 서해안병력 빼내/부산엔 전선서 도망친 대대장 많아/나중에 별단 위세있는 장성되기도한국전은 어느덧 미국전쟁이 돼 있었다.
미국은 1945년 38선 이남의 점령군으로 들어와 북쪽지배군인 소련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동안 약간 지쳐있었다.
소련과의 끈덕진 외교대결,어쩌면 무력대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의 대결까지를 힘겨워하면서 국제연합(UN)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반도남쪽에 한국정부를 세우고 철수해 버렸다.
6ㆍ25가 터지자 로버트ㆍ올리버는 『왜 전쟁이 한국에서 났는가』를 써서 뉴욕타임스지 서평란에서 극찬을 받은후 1950년대의 베스트셀러자리를 줄곧 차지했었다. 이 책에서 올리버는 한국전이 2가지 이유때문에 일어났다고 썼다.
첫째는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이웃 강대국들의 「침략의 길목」이기 때문이고,둘째는 미국이 2차대전이후 소련과의 대결을 거의 노골적으로 피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소련전차,소련전쟁계획으로 시작된 6ㆍ25를 이제 정부를 세운지 불과 2년밖에 안되는 한국이 이를 막아낸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엔결의 절차를 밟아 미국이 결국 뛰어들었을때 이전쟁은 반도남쪽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던 것이다.
맥아더는 2가지 신념을 가진채 동경의 유엔군사령부에 앉아 한국작전을 지휘했다.
공산주의는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과 전쟁은 시작하면 끝까지 이겨야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신념인 동시에 전미국인의 신념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한강남안의 최일선을 시찰한후 즉각 대만의 장개석정부를 시찰했다. 이것은 당시 장개석을 싫어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심각한 반발을 샀지만 맥아더는 이 전쟁이 처음부터 북한이 저지른 전쟁이라고 보지 않고 공산팽창세력의 거대한 음모라고 봤기 때문에 아시아전반전략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유중국을 방문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대만은 그의 책임구역이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종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한반도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전쟁개입시부터 38선을 여러번 들먹거렸다. 유엔결의안을 통해 『인민군은 38선 이북으로 철수』 『38선 이남의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엔군을 결성한다』 등의 지역전쟁,그것도 반도남쪽의 전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후일 미국은 한국전을 통해 『전쟁은 일단 붙으면 이겨야한다. 여기에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빛나는 전통을 처음으로 깬 비극을 연출했다고 말했듯이 처음부터 38선 이남운운은 믿으려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
인민군의 공격이 빠르면 빠를수록 보급선이 길어지므로 인천상륙을 통해 이들을 궤멸시키기가 더좋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인민군이 궤멸되면 그것은 북한의 종말을 의미한다.
10개의 정예사단의 공격군앞에 1개대대(스미스부대)를 던진 것은 인민군이 미군을 깔보고 더욱 공격속도를 급하게 서둘도록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천상륙작전후 평양을 공격하고 북한을 평정한후 압록강ㆍ두만강에 코발트선을 쳐 이 침략의 길목에 적어도 향후 1백년간은 공산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대전쟁계획이 밝혀져 60년대초 타임지에 작전지도와 함께 실린일이 있었다.
중공군이 전쟁에 뛰어들면 밑으로 끌어내려 보급선을 다시끊고 그들이 젖줄을 대고 있는 만주를 사정없이 폭격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너무 오래 외국에 나와 있었다. 그는 6ㆍ25당시 50년 군대생활중 절반이상을 해외에서 지냈으며 그것도 마지막부분은 1백% 해외주둔생활이었다.
미합참본부에는 그가 미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의 생도들이 최고지휘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그의 명성이 지배했을뿐 그의 작전계획을 적극 밀어줄 사람은 거의 한사람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맥아더의 명성에 도전해보려는 「사관생도들의 철없는 용기」만 가득했다.
그가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올렸을때 미합참본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을 5천분의 1로 보고 이런 무모한 희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거부했다.
거부이유는 첫째 간만의 차가 세계제일의 험악한 조건이어서 1차공격에 실패하면 실패한다. 둘째 상륙에 성공하더라도 낙동강전선과 서울전선이 너무멀어 연결이 안된다. 셋째 낙동강전선을 지키기도 힘든데 그중 일부병력을 빼내 상륙작전에 돌린다는 것은 마지막보루를 잃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찬성자는 아무도 없었다. 노원수는 계속 작전계획승인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애버럴ㆍ해리먼 백악관특별고문,래리ㆍ노스태드장군,존ㆍ리지웨이 함참차장 등 일단의 고위정책결정자를 동경에 파견해 노원수의 상륙작전계획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더이상 조르지 말도록 결론짓고 오도록했다.
이들 일행은 동경으로 날아와 8월6일 맥아더사령부에서 대결전의 회합을 열었다.
그러나 후일 리지웨이가 고백한 것처럼 『이들 워싱턴의 군정책결정자들은 맥아더가 군사작전의 천재인줄만 알았지 설득의 천재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 잘못이었다. 일행은 회합에서 맥아더의 2시간반에 걸친 조직적인 설명과 신념있는 웅변으로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은 가결됐다.
해리먼은 회합을 마치고 나오면서 리지웨이장군에게 『미국이 맥아더를 갖고 있는 것은 역사의 행운기이기 때문이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맥아더는 극동해군사령관 셔먼제독에게 즉각 인천상륙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미해군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큰 능력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소』라는 말한마디로 이 5천분의 1의 장벽을 뚫으라고 했다.
낙동강전선의 급한 불을 끄면서 미해병1사단을 전선에서 빼냈다. 일본에 마지막 남은 미7기병사단과 함께 인천앞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한국군 제17독립연대(옹진에서 후퇴한 백인엽부대)와 신현준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해병연대도 동승했다.
이때쯤 낙동강 방어전선의 날카로운 사령관들은 어쩌면 인민군최후공세가 스스로 풀이 꺾이는 듯하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갖기 시작했다. 미공군전사에 따르면 공군은 한국전에서 공중전 뿐아니라 지상전도 다같이 수행했다고 쓰고 있다.
공중에서 보면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대부대가 밀고 내려오는데 아군은 무조건 도망을 가거나 어떤때는 그런 후퇴병도 없이 마구 인민군부대만 전진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비행기와 탱크가 맞붙어 싸웠다.
이때는 공지합동작전장교도 없었고 아군의 대공표판도 없었기 때문에 탱크가 있고 병력이 많아보이면 무조건 폭격하고 기관총소사를 해댔다. 국군도 죽고 미군도 미군비행기에 의해 죽는 경우가 있었다.
6월30일경에 미공군은 북한의 야크비행장을 거의 모조리 때려부셨기 때문에 제공권은 완전히 미공군에 있었다.
도로라는 도로,교량이라는 교량은 모두 부셨기 때문에 인민군보급선이 나중에는 너무 가늘어져 이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공군사에 기록될 수 있을 정도로 인민군공격대는 너무 공중공격을 맞아 낙동강전선쯤에서는 만신창이였다. 탱크도 없고 탄약도 떨어졌으며 식량,피복 등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내무장관 조병옥은 이때 영천전선을 찾아갔다.
국방장관은 벌써 부산으로 내려가 버렸는데 엉뚱한 내무장관이 포탄막을 뚫고 약간의 위문품을 싸든채 개인호를 방문했었다. 조박사는 「나의 회고록」에서 당시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했다고 쓰면서 『아마도 그때 사기가 올랐는지 영천은 방어됐다』고 쓰기도 했다.
안동전투에서는 김석원의 수도사단 일선대대장이 밤에 도망을 가버려 사단사령부가 인민군기습을 받았다. 대대장은 후방으로 도망가면서 『전선 이상없음』이라고 야간보고를 계속해 전선이 그대로인줄 알고 있다가 일시에 사단사령부가 녹았다.
김사단장은 그 대대장을 찾아 즉결 처분하려했으나 후일찾아보니 무슨 뇌물을 어떻게 먹였는지 육본 어느요직에 버티고 있어 통탄했다.
월남철수때 마지막 철수임무를 지키다 포로가 됐다가 5년만에 살아돌아온바 있는 전주월공사 이대용씨도 그때 부산에는 전선에서 도망친 중대장ㆍ대대장들이 마산결핵요양소나 외과병원의 맹장염수술대에 누워있다가 나와 후방부서에 틀어박히곤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나중 별몇개를 단 위세있는 장성이 됐다.
전선의 보급이 제대로 될턱이 없었다. 대용식,피복,군사유지비 등이 중간에서 잘리고 찢기고 하는 바람에 전선의 고통은 더욱 심했다고 김석원장군은 그의 회고록 「노병의 한」에서 쓰고 있다.
포항전선에서는 일단의 학도병들이 부대를 찾아가던중 부대편입도 못한채 인민군우회공격군을 만나 못다핀 청춘을 고스란히 지운 사건이 발생했었다. 48명이었다. 김석원사단을 찾아 도보로 포항까지와 산화된 이 젊은 넋을 김장군은 『저승에서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라고 쓰고 있다.
부산피란지는 그런데도 흙탕물이었다. 『차량이란 차량,배란 배는 모두 군인들이 징발해 장사를 해처먹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이대통령이 임석한 임시국회에서 고발해 현장조사를 시키게한바 있는 장홍염전의원(81)은 말했다.
이승만은 『그럴리가 있느냐』며 『거짓이면 나를 감옥에 넣으라』는 장의원의 말을 담보로 현장조사를 시킨결과 사실임이 밝혀져 『징발된 선박ㆍ차량은 즉각 징발해제하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인민군은 이 최후의 낙동강전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미합참본부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부산교두보를 밀어버리면 인천상륙군이 상륙에 성공해도 고립될 것』이라는 계산아래 이미 설치했던 서해안방어사령부(사령관 최용건)예하인민군 제18ㆍ22사단의 일부 병력을 낙동강선으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상륙함대는 더글러스ㆍ맥아더원수,에드워드ㆍ알몬드 미10군단장 등을 태운채 인천앞바다의 만조시간을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이날 9월15일의 만조시간은 아침 6시59분이었다. 2시간후에 인천항은 30피트(10m)높이의 반역적인 썰물을 끌고 나간채 허연 개펄을 드러낼 참이었다. 만약 1차공격이 실패하면 상륙부대는 밤 7시15분의 저녁만조시간까지 버텨야한다. 그때가 돼야 다시 밀물을 타고 2차상륙대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맥아더는 이날 새벽H아워의 공격명령을 내린후 선실에 들어가 잠을 잤다. 심한 포성에 잠을 깨어보니 미해병 제1연대가 5시32분에 성공적으로 상륙했고 이어 33분에 미 제5해병연대,6시에 한국해병연대,6시33분에 미7사단이 상륙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성공이었다. 맥아더는 이날 아침 특유의 그 불룩한 가슴을 앞으로 쑥내민채 일단의 장군들과 함께 원수복장의 바지가랭이를 바닷물에 흠뻑 적시며 첨벙첨벙 걸어 나와 월미도에 첫발을 디뎠다.
인천서울원주선을 긋고 제2전선을 형성한 인민군 22,18사단의 저항은 상당한 것이었으나 「5천분의 1 성공」을 한 상륙대에 맞설수는 없었다.
낙동강전선은 와르르 무너졌다. 국군ㆍ유엔군은 전선에 묻은 그 많은 전우들을 뒤로두고 북으로 북으로 진군했다. 인천상륙 15일만인 10월1일 이들은 벌써 38선을 넘고 있었다.<정일화 북한부장>정일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