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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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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3

입력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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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서울3일」모 권고설 대두/미군 개입따른 중공참전 우려/진격ㆍ후퇴속 피아 무차별 학살/서울대병원 국군부상병 1천명 피살/무명용사 적 결사저지에 맥아더 감동/「사수」믿었던 사람들 오히려 반역자 몰려『동족간에 전쟁이 일어나다니.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누 누구를 상대로 총질을 한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탄식이 6ㆍ25아침 반도를 분노케했어야 할 것 같지만 어떤 6ㆍ25증언이나 증언자의 말에서도 이런 표현은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잔인한 전쟁이었다.

인민군주력 제105탱크여단의 정치장교 오기완(대위)은 의정부를 지나면서 예하부대에서 일단의 국군포로를 잡아온 것을 목격했다. 첫 포로여서 여단장 유경수(소장)에게 넘겼다.

여단장은 몇마디 포로신문같은 것을 하다가 신통한 대답이 안나오자 귀찮다는 식으로 『해치워버려』하고 경호대에게 명령했다. 이어 사단본부근처의 야산에서 『드르륵 드르륵』하는 몇번의 따발총소리가 나고 상황은 끝났다.

27일 밤. 어둠이 막 한강위로 깔릴때쯤이었다. 국군포병부대의 안소위가 군트럭에 일단의 서북청년단원을 태우고 노량진쪽에서 한강다리를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미 한강교 폭파계획이 하달된 뒤였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의 통행은 절대 통제된 상황이었다.

그는 헌병을 권총으로 위협해 결국 한강을 건넌후 서대문형무소로 직행했다.

무장청년들로 하여금 형무소를 뒤져 구속돼있는 「최상급악질 빨갱이들」을 끌어내게 했다.

이 무장청년들은 남로당계보를 훤히 알고 있는 「빨갱이 체포단」들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어떤자를 끌어내라고 하는 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의 수감자들이 포승에 묶여 트럭에 가득 올랐다.

벌써 서울은 인민군 탱크가 들어왔고 미아리고개에 퍼붓던 포성도 멈춘뒤였다. 새벽녘에 트럭은 한남동 강기슭에 세워졌고 수감자들은 강모래사장으로 끌어내려져 총탄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인민군만세,김일성원수만세』를 불렀다.

안소위일행은 곧 끊어진 한강다리를 위로 보며 모래채취선을 타고 도강했다.

후일 한 사석에서 안소위는 『그때 만일 우리가 그 빨갱이들을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서울은 28일 당장 피바다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들은 서울파 남로당원 핵심으로 서울의 거리 하나하나 어느집에 누가 사는지까지를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살아남았다면 우익인사는 한사람도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제2대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중장은 저서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서 『미군들이 한국전에서 기억하는 것은 온 천지에 깔린 똥냄새뿐』이라고 썼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한 살인냄새가 6ㆍ25시작전에 이미 반도에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났다』는 말은 반도의 남북에서 이미 저질러지고 있던 좌우간의 피를 흘리는 대결이 보다 큰 힘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8일 정오쯤. 문산쪽의 봉일천국민학교에 사단사령부를 설치하고 인민군주력 1사단,6사단 그리고 206탱크연대의 강공을 받고도 이를 끈질기게 견디고 있던 국군1사단의 백선엽사단장(대령)은 곡릉천다리옆 제방에 연대장과 참모들을 불러모아 놓고 목멘 고별사 같은 것을 했다.

『나흘동안 잘 싸워줬다. 오늘아침 서울이 떨어졌다. 한강다리도 폭파됐다… 각자 후퇴하여 시흥보병학교 아니면 지리산에서 만나자』

전날 전선독전차 왔던 김홍일소장이 세불리함을 확인하고 돌아와 채참모총장에게 후퇴명령을 내리라고 전화기까지 몇번 들이댔으나 채는 사수하라는 말만했다. 그리고 1사단에는 연락한마디 없이 28일 새벽3시 한강다리를 피란민 행렬과 함께 물속으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군인ㆍ경찰ㆍ민간인 등 최소한 5백여명이 수장됐다.

육군본부의 김백일 참모부장,장창국작전국장 등 주요참모들도 다리를 건너지 못한 상태였으며 육본의 주요서류,각 군사보급창등도 아무런 파기조처도 안한채 다리가 덜렁 끊겨졌었다.

인민군은 이들을 고스란히 접수할 수 있었으며 육군피복창을 열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이 국군복장을 얼마든지 꺼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후일 엄청난 피해를 가중시키기도 했다.

수원에 설치됐던 미8군전방사령부의 당시 집계에 의하면 전선에 투입된 국군 9만8천명중 한강을 건너온 장병은 2만4천명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육본의 후퇴작전은 서울과 국군을 온전히 인민군에게 바치려는 계획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민군탱크주력은 28일 상오 미아리고개를 넘어 잘 무장된 4개사단 주력을 거느린채 명륜동 등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창경원,중앙청,장충동공원 등에 번쩍거리는 무장군인들이 들어섰고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된 남로당거물 이승엽은 인민군승리의 축하식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서울을 사수한다고 몇번이고 말하던 이승만대통령(사실은 녹음방송이었으나 당시는 녹음방송이란 것이 있는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과 정부각료들,국회,그리고 국군이 눈깜짝할 사이에 한강다리를 부수고 서울을 떠나버린 그후의 정경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영등포에서 조각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간 국회의원도 있었다. 육군총사령관을 지낸 송호성장군도 서울에 남았다가 뒤에 인민군사단장이 됐다.

아마도 절대로 공산당일수 없어보이는 상당한 인사들이 공산당원임이 밝혀졌을 것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 재빠른 전향을 한 인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데까지 피하다가 잡혀서도 끝내 자유를 지킨 저명인사도 무한히 많았을 것이다.

정부와 군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신뢰하거나,후퇴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교회를 지켜야돼』 『이 학교를 버리고 떠날순 없어』라며 서울에 그대로 남았던 인사들은 그후 스스로 약속을 어긴 정부ㆍ군당국에 의해서,또는 재빨리 서울을 떠난 발빠른 사람들에 의해서 반역자(월북자)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그 가족들까지도 피해를 입는 부끄러운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북한은 이 진위의 기록을 갖고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공개될 것이다. 총을 든 군인ㆍ경찰중 죽음에 이르도록 사수명령을 지킨 경우도 많았다.

육군전사는 일산남방의 도로변옆에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아 적의 전차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전차에 기어올라 반쯤열린 운전석으로 수류탄을 까넣고 전차파열과 함께 자폭한 어느 공병대 사병의 얘기를 김명중대위의 말을 빌려 싣고 있다. 이 사병은 『중대장의 명령대로 할 것』이라면서 후퇴하기를 절대 거부했는데 그 병사의 이름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비슷한 얘기는 29일 맥아더의 한강남변시찰에서도 있었다.

맥아더일행은 망원경으로 서울저편을 관찰한후 개인호에 우뚝서서 한강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는 땅딸막한 체구의 한 하사관에게로 접근했다.

통역 김종갑대령을 통해 장군은 하사관에게 물었다.

­소속은. ▲분대장입니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것인가. ▲명령이 있을때까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명령이라니. ▲소대장님의 후퇴명령입니다.

­명령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습니다.

­생명보다 인가. ▲그렇습니다.

­만일 후퇴명령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의 순간까지 싸울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단말인가. ▲두렵지 않습니다.

이 짧막한 하사관과의 대화를 마친 맥아더원수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의 표정이 어렸고 아마도 그것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결심이었을 것이라고 일행들은 추리하고 있다. 김종갑대령은 후일 그 하사관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전사했는지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정일권씨 증언).

남소위라고만 알려진 20이 갓넘은 젊은 장교가 이끌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방어소대의 최후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25일 아침부터 전38선에서 전투가 벌어짐에 따라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개성 문산 동두천 포천 의정부 등에서 부상한 장병들중 무겁게 부상했거나 장교들인 경우 우선적으로 연건동의 서울대학부속병원으로 이송됐다. 28일 아침에는 9백 몇십명으로 거의 1천명의 환자들,주로 부상병으로 이뤄진 환자들이 대학병원의 입원실 수술실 진찰실 병원마룻바닥까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남소위소대는 누군가로부터 인민군이 쳐들어 오면 부상군인들을 해칠테니까 병원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인민군은 28일 역시 부상병을 대학병원으로 싣고 왔다. 의사 간호원들의 상당수가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못한채 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1개소대가 병원의 전후좌우를 단단히 지키고 있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완강히 버티는 남소위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대대병력 이상이 병원으로 몰렸다.

국군은 지리를 잘 이용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병원내부의 연통자가 인민군을 이끌고 명륜동쪽담을 넘어 내부로 들어왔다. 소대장이 전사하고,선임하사가 전사하고,차례차례 남소위소대의 마지막 분대원 한사람까지 전사했다.

대학병원을 점령한 인민군은 우선 국군 부상병을 침대에서 수술대에서 끌어낸후 인민군 부상병을 여기에 올렸다. 그후 조직적인 살인행위가 시작됐다.

병원을 우연히 찾아온 환자ㆍ친척도 살아나가지 못했다. 살인소식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위해 이들도 같이 죽였다.

9백 몇십명이 고스란히 살해됐다. 세계전사상 예가 없는 잔인한 살인행위다. 남소위가 누군지 민하사와 부대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9백여명에 이르는 환자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이제껏 밝히려는 작업마저 없었다.

전쟁중 명륜동ㆍ연건동일대의 주민들은 대학병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체냄새,파리떼 때문에 종일 모깃불을 지핀채 살아야 했었다.

지금 병원숲속에는 한국일보사가 세운 조그마한 위령비가 하나 세워져 원혼들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인민군은 왜 전쟁의 귀중한 시간중 서울에서 3일을 꾸물거렸는가. 한강다리도 3개중 철교1개는 난간이 약간 휜채 온존하고 있었으며 내려올때 상당한 도하장비까지 준비했었는데 이들은 왜 한강을 바라만 보면서 국군을 쫓지 않았는가.

전술연구가들은 만일 인민군탱크부대가 28일 그날 바로 한강을 넘어 진격을 계속 했더라면 낙동강방어선은 채 구성될 시간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분석된 해석으로는 첫째 인민군은 서울입성의 승리감에 젖어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박헌영이 말한대로 전국에서 일어날 인민봉기를 기다렸다는 것. 셋째는 충분한 도하준비와 앞으로의 진군계속을 위한 세부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것이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문 이유로 돼 있다.

89년부터 공개되고 있는 중공군개입자료에 의하면 이때 모택동은 『전쟁은 보급로와 퇴로확보가 중요하다』면서 급한 추격전을 여러번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지상군개입과 이에 따른 중공군개입을 우려했던 모택동의 제어책이었을 것이며 인민군은 이 충고때문에 꾸물거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30일 밤 드디어 김일성은 몰래 서울에 들어와 현 국방부자리에 있던 육본지하실의 인민군참모부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7월1일 한강이남진격을 명했다.<정일화 북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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