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탱크 분산… 방어시간 벌어/경부로 집중공격 했으면 적화가능성/국군 과대평가ㆍ봉기기대 전격전 안해/육참총장,국회서 졸아… “반격” 거짓발표로 대혼란한국전은 평범한 전쟁이었다. 인원과 화력이 우세하면 공격에 성공했고 인원과 장비가 열세이면 밀리는 그런 전쟁일뿐이었다.
2차대전중 이탈리아 상륙작전을 위한 고도의 정보전이라든지,연합국 상륙지점을 잘못 판단해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히틀러전쟁 사령부 모습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돋보이는 것이지만 이 상륙작전은 뒤이은 몇가지 후속조처의 미비로 빛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뒤의 분석이지만 침략군(인민군)은 처음부터 좀더 과감한 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일 그랬다면 6ㆍ25는 인민군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인민군이 전격탱크전으로 나왔다면 한반도는 순식간에 적화로 끝났을 위험이 충분히 있었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 홍성태씨(예비역준장ㆍ전전차사단장)는 만일 인민군이 전차부대를 주공로에 집중시킨채 경부선로를 따라 밀었다면 아무리 미군참전이 빨리 진행됐어도 남한적화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탱크전격전을 몰랐다는 것.
북한은 6ㆍ25당시 T34탱크 2백42대,SU72㎜ 자주포 1백76대,장갑차 54대를 갖고 있었다.
이 전차는 시속 40㎞로 행동반경 3백50㎞였다.
당시 한국군은 이 탱크의 괴력을 막아낼 아무런 힘이 없었다. 탱크를 앞세운 19만8천의 인민군 정병 역시 훈련ㆍ장비ㆍ사기면에서 국군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위에 있었다.
인민군은 주공을 서울 침공에 두면서도 38선 전전선에 탱크를 비롯한 병력을 비슷하게 깔았다.
제 105 탱크여단(뒤에 사단)은 주공인 동두천의정부선의 인민군 제4사단에 107연대를,포천의정부 공격의 인민군 3사단에 109연대를 배치해 주공격선을 강화하긴 했지만 개성문산침공로의 제1,제6사단과,춘천침공로의 제7,제2사단 그리고 강릉방면 침공로의 제5사단에게도 1개대대이상의 탱크,자주포부대를 붙였던 것이다. 미공군의 본격적인 지상군 근접지원(CAS)은 미 24사단의 대전 방어가 시작된 7월12일까지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만일 인민군 주력 제105탱크여단의 총병력이 주공에 투입된 채 전격전이 실시됐다면 서울은 28일 새벽이 아닌 6월25일 그날 바로 함락됐을 것이며 이 주공력이 패튼이나 롬멜처럼 서울 지휘부의 지휘통제ㆍ통신기능(3C)를 마구 짓밟고 그대로 한강을 건넜다면 대구 방어선 같은 것은 성립되지도 않은채 부산까지 줄곧 내달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인민군은 탱크 주력을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이날 새벽 30분간에 이르는 일제 경고사격으로 잠든 국군을 깨워 귀한 방어시간을 벌게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첫째는 6ㆍ25가 소련전략 개념에 의해 설계됐다는 것. 소련은 광활한 개활지를 누비며 전쟁을 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두꺼운 공격벽을 개활지에 늘어 세운후 함성을 질러대며 적을 공격하는 전투모양을 그려왔다. 지휘ㆍ통제ㆍ통신계통(Comand,Control and Communication)을 일시에 짓밟고 3C가 미처 재정비 되기전에 깊은 종심을 뚫어 단숨에 적을 두조각으로 내 버리는 서구식 전차전술과도 달랐다.
둘째는 국군병력을 과대 평가했을 것이라는 것.
인민군 작전계획에는 28일 서울 점령으로 돼 있었다.
주력부대는 26일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한후 여기서 28일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꼬박 하루를 빈둥거렸다.
아마도 탱크위력이 그렇게 강한 것인지를 작전계획 수립자들 자신도 몰랐을지 모른다. 인민군은 『전쟁이 너무 싱겁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셋째는 남한의 반정부 봉기를 과잉기대 했다는 것. 거대한 병력이 38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이미 설치돼 있던 지리산,오대산 등의 5개 게릴라 전투지구에서 일시에 후방교란전투를 일으킬 것이고,그렇게 되면 적어도 20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1953년 3월 김일성이 박헌영을 처형할때 고백한 것으로 박은 인민군이 밀고 내려만가면 적어도 20만 인민이 봉기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말을 믿다가 낭패했다는 것이다.
38선 최서쪽 옹진반도.
독특한 지휘스타일로 「악질지휘관」으로 평판이 높던 백인엽대령이 이끈 17독립연대가 50년 1월 18연대와 교대하여 38선에 의해 섬으로 변해버린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었다. 적에게 밀리면 바로 바다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배수진을 치고 있는데다가 지휘관의 독전스타일 때문에 17연대는 『싸움질하는 부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백대령은 만일 북이 밀고 내려오기만 하면 단숨에 이를 짓눌러 해주까지도 쳐 올라갈 수 있다는 호언을 했다. 그의 이 호언은 후일 엉뚱하게도 남이 북을 먼저 침공했다는 「증거」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군사기가 강했던 것 만은 확실했다.
25일 새벽 4시. 인민군 38경비여단 예하 3개대대 방호산(소장)이 지휘하는 6사단 예하 14연대,그리고 20여대의 탱크와 기마병대가 약 1시간 가량이나 퍼부은 포음에 이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자동에 있던 제1대대 학산에 배치된 제3대대,그리고 급히 동원된 냉정리의 2대대 등은 처음에는 가끔 있어오던 국경분쟁의 일환으로 보고 두려움 없이 응전했다.
그러나 2배의 병력,탱크를 앞세운 중화기포격을 견뎌낼 수는 없었다. 제1대대장 김복태 소령은 곧 전사했고 백연대장은 지휘봉 대신 기관총을 들고 적을 공격했다.
17연대는 만하루 이상을 버텼다.
인민군은 3여단 병력으로 17연대 정면을 밀고 6사단 14연대가 국군후미를 장악하여 17연대를 온전히 사로잡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인민군 14연대는 전면을 뚫지 못했다.
백대령의 17연대는 싸우면서 후퇴하며 육본철수 계획에 따라 파견된 LST선을 타고 인천으로 철수했다.
개성지구.청단에서 적성까지의 90㎞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1사단은 6월25일 아침 사단장 백선엽 대령,사단장 대리 최경록 대령도 부재중이었다.
백선엽은 이때 시흥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24일밤의 육본저녁 파티에 참석했다가 마침 월요일날 학교시험이 있어 신당동집에 좀 일찍 들어와 공부를 하다가 아침을 맞고 있었다. 최대령은 토요일이라서 남대문 근처의 본가에 외출나와 있었다.
1사단은 3개연대중 12연대를 임진강다리개성방면에,13연대를 고량포일대에,그리고 11연대를 수색의 사단본부에 배치해 놓고 있었으나 농번기 휴가 등으로 장병은 휴가자가 많았고 차량 상당수는 부천수리공장에 들어가 있었다.
개성지구로는 8로군출신 역전의 맹장인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밀고 내려왔다. 이들은 개성을 아예 열차편으로 1개연대(15연대)를 실어 날라 무혈점령한 뒤 곧바로 임진강다리쪽을 밀었다. 국군 12연대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임진강다리를 폭파할 틈도 주지 않은채 곧장 파장리로 사단사령부를 옮겼다.
고량포쪽의 인민군 제1사단은 강력한 제105탱크여단소속 205탱크연대를 앞세워 고량포의 임진강 도섭지역을 넘어 13연대를 공격했다.
백선엽은 25일 새벽 작전참모 김덕춘 소령으로부터 『큰일났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육본으로 가 다시 사단을 지휘해도 좋겠느냐는 질문을 한후 사단고문 로크웰징 중령,최경록 사단장대리와 함께 수색사단 사령부를 거쳐 25일 아침 10시반께 전선이 보이는 파주국민학교에 도착했다.
그는 적전차를 수류탄을 안고 쳐들어가는 육탄공격을 지휘하면서 27일밤 다락고개도내리151고지외화산신산리에 이르는 봉일천 방어선을 쳤다.
중부전선의 한국군 7사단은 제1연대를 동두천 방면의 38선 정면에,제3연대를 포천방면에 두고 있었는데 인민군 주력부대인 제4사단과 제3사단이 각각 107,105탱크연대를 앞세우고 밀어 붙여 어떻게 응전해볼 틈도 없이 의정부서울로 후퇴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춘천일대와 강릉전선은 좀 형편이 나았다.
이곳은 인민군의 조공지역인데다가 지형관계로 탱크운용이 여의치 않았으며 국군이 마침 개인 참호를 파는등 상당한 응전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접전다운 접전이 제법 벌어졌었다.
이 조공록은 일단 전선을 뚫은 후 일부는 서울로가 3ㆍ4사단과 합류하고 일부는 원주를 거쳐 경기도 이천 대전 등으로 가 후퇴하는 국군병력을 모조리 포위할 참이었다. 춘천의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대령),강릉의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대령)의 분전으로 인민군의 작전은 상당한 변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군전선에는 이탈자가 속출했다. 강릉 6사단에서는 중대장이 부대를 버리고 도망을 쳤고,의정부 7사단에서는 대대장이 꼬리를 감췄으며 문산 1사단에서는 『나라가 망했는데 집합은 무슨 집합이냐』며 장교,하사관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나섰다.
육군본부의 정황은 더 심했다. 일부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25일 국회에 불려나가 증언석에서 졸다가 국회의원들에게 호통을 맞았고,의정부전선 시찰때도 입에 술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24일밤의 파티로 아직도 취해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의 반격론이었다.
국회증언과 육본발표를 통해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지금 국군은 반격중이다」라는 거짓말을 발표해 서울을 아무런 피난준비도 못하게 한채 고스란히 적수중에 던져 넣으려하고 있었다.
국군 7사단에게는 반격명령을 내렸다. 육사생도들도 모조리 소총을 들고 적에게 덤벼들라고 했다. 제1사단은 한강 이남으로 일단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려 했으나 후퇴는 안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정보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6ㆍ25 아침 그 막강한 전력이 현실인 것을 직접 목격하고도 국군을 후퇴금지,반격개시 등의 명령을 내리는 한편 조속히 한강다리를 끊어버린 것은 국군을 적의 아가리에 강제로 밀어 넣은 『거대한 음모』라고 볼 수 있음직 했다.
『육사생도들은 군을 이끌고 나갈 지휘관 후보들인데 그렇게 쉽게 죽여서는 안된다』는 이준식 교장의 진언이 있었으나 채총장은 이를 듣지 않고 소총부대원으로 투입 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정일화 북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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