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이 조인된지 1년 지난 1954년 7월29일 낮. 백악관에서는 아이젠하워ㆍ이승만 두대통령을 주축으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회의벽두 아이젠하워는 대뜸 『도대체 귀하는 우리의 친구인가 아닌가. 우방국들의 사전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포로를 석방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고 언성을 높였다. 이에 이박사는 『미국이 한국전에 파병한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 아닌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와 인권을 주려고 석방한 것이다』고 반박했다.
이번엔 존ㆍFㆍ덜레스국무장관이 나섰다. 『정말 귀하가 한 일이 잘했다는 말인가.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한국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으며 귀하역시 대통령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고 빈정거리듯 말하는게 아닌가. 화가난 이박사는 벌떡일어나 『미국의 귀빈접대방식은 이런 것인가. 그 문제를 추궁하려고 나를 초청했다면 더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며 퇴장하려하자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당황,만류하여 겨우 분위기가 가라 앉았다.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가 환영인사도 생략한채 화를 낸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의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그는 취임전부터 휴전협상에 열중했고 거의 마무리를 지으려던차에 협정조인 한달반 전인 6월18일 이박사가 반공포로를 기습적으로 석방하여 찬물을 끼얹었고 휴전후에도 걸핏하면 내세우는 「북진통일」에 쐐기를 박기위해 초청한 것.
그러나 이박사가 미국도착 다음날 상하원합동회의 연설에서 『세계정복을 꿈꾸는 소련이 수폭을 대량생산하기 전에 미국은 공군을 동원,생산시설을 궤멸시켜야 한다』 『미국의 지원이 있을 경우 아세아의 2백만 자유군대는 중공을 격퇴시킬 것이다』고 역설,새로운 대공전을 부추기자 더욱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크의 의중을 일찍부터 꿰뚫고 있던 이박사의 단수는 몇단계 위였다. 즉 휴전은 강대국들의 합의된 대세여서 피할 수 없지만 미국을 자극,최대한의 원조를 받아내자는 계산이었다. 결국 이박사의 초강경 반공ㆍ대미외교는 전재복구와 한국군증강을 위한 막대한 경ㆍ군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뒤 노태우대통령은 단2주일 사이 강대국인 미국 소련 일본의 정상들과 잇달아 만나 과거청산,그리고 한소관계개선 한반도 및 동북아안정 남북한 교류촉진의 가능성을 여는 외교실적을 올렸다. 그중 공산종주국인 소련의 고르바초프대통령과 국교수립ㆍ협력증진 등에 의견을 모은 것은 커다란 「외교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어느나라이건 집권자가 외교와 내정에 모두 성공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따라서 양자를 국민의사를 바탕으로 균형있게 추진하고 또 성과를 올리는 일은 매우 이상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 양자에 모두 성공한 예도 없으며,균형있게 추진하여 나름대로 성과를 올린 예도 좀처럼 찾기 힘들다.
식자들 사이에는 흔히 역대집권자의 능력과 실적을 평하는 말이 있다. 즉 「이승만대통령은 외교와 인사에는 귀신이나 내정에는 등신이다」 「박정희대통령은 내정(경제발전)과 인사는 어느정도 수준급이나 외교는 낙제다」 「전두환대통령은 내외정 인사모두 등신이자 낙제이다」 등등.
그렇다면 노대통령은 어떠한가. 아직 임기중이어서 속단하기가 어렵다. 구태여 말하자면 외교,특히 북방외교는 상당수준 성공했지만 내정과 인사의 경우 많은 숙제가 쌓여 있는 미결의 장이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소 정상회담으로 지난 10여일간 나라안은 온통 소련붐 소련무드속에 휩싸이다시피 했다. 아무튼 회담은 북한과 교류하고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요,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머리를 식히고 내치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아직도 「총체적 난국」이 지속되고 있는 국내문제해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여당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정치를 복원하는 일이다. 지난 1월 3당통합이후 근 5개월 가까이 여당의 내분과 창당준비,그리고 야당의 기득권수호 몸부림을 이유로 무정치와 정치공백이 계속 되어왔다. 이른바 신사고에 의한 생산적인 새정치를 보여주겠다는 거여의 호언과 달리 지극히 중요한 시기에 정치가 하나도 제기능을 하지 못한 것은 국민에 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면에서 이번 임시국회는 3당통합의 당위성과 함께 민자당이 과연 거여의 구실을 할 수 있는가 여부를 가리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둘째 민자당은 이번 국회에서 지방자치선거법,국가보안법,광주보상법 등을 반드시 매듭지어야 한다. 지방자치는 민주화의 기본이자 핵심인만큼 후보정당추천제를 광역단위만이라도 허용,반드시 통과시켜 연내선거가 이룩되도록 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개정은 북방외교추진과 필연적으로 함수관계가 있다. 어느정파도 얄팎한 인기에 영합함이 없어,또 거여는 북방외교남북관계 증진이란 측면에서 대국적으로 대폭수정하는 아량을 보여야 할 것이다.
셋째는 치솟는 물가를 잡는일과 안정적인 주택정책의 마련이다. 특히 서민들의 내집마련과 전ㆍ월세값의 안정적인 조정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다음으로 지난 양대선거와 3당통합때 공약한 내정개혁이다. 정부여당은 집권공약중 금융실명제처럼 유보되거나 이행못한 사항들이 얼마나 있는지,또 약속된 것은 어느정도 실천에 옮기고 있는지 하나하나 검증,국민에게 진도표를 제시해야 한다. 노정권이 정권의 위신을 걸고 단행했던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의 처분만해도 국민들은 매우 의구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신고한 부동산의 질과 내용들도 문제투성이지만 신고한 달이 지난 현재 단1%도 매각을 하지 못한데다 최근에는 대기업들이 보유부동산에 대해 세제감면과 업무용으로의 전환을 당국에 요구하는 로비설이 파다하여 국민을 분노케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여당은 비상한 각오로 내정수습에 나서야 한다. 북방외교의 화려한 외향적성과에 자가도취되거나 또 이같은 여세가 어렵고 골치아픈 국내문제를 덮어준다고 생각한다면 크 오산이다. 외교에 이어 내정수습 역시 가시적인 성과가 병행돼야만 노대통령이 다짐한 연내의 경제사회의 안정도 이룩할 수 있고 또 내년부터 추진할 내각제개헌도 수월하게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정수습에는 왕도가 없다. 국민의 뜻을 받들고 집권공약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만이 최선의 지름길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국민들은 집권자가 내정ㆍ외교ㆍ인사 등 모든 부문에서 귀신이라는 평을 듣는 「기적」을 반드시 기대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내외정의 균형있는 추진과 성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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