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검문소엔 찌그러진 차단기뿐/인근주민들 통일전에도 자유왕래/사나아덴 「통일로」공사 한국기업서 맡아북예멘수도 사나에서 남예멘수도 아덴까지의 거리는 약 4백50㎞. 험산준령을 넘어가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꼬박 6시간 반을 달려야 했다. 해발 2천3백m에 위치한 사나를 떠나 「아리비아의 지붕」인 해발 3천5백m의 수마란고원지대를 지나자 자동차는 곤두박질하듯이 달려 해발 0인 항구도시 아덴에 이른다. 1시간이상 내리막길을 줄곧 달리는 동안 가빴던 호흡은 광활한 황야를 휩쓸며 불어치는 열대특유의 고온다습한 바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남북예멘을 갈라놓았던 것은 이념의 차이만이 아니라 자연환경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산악지대를 빈틈없이 계단식 경작지로 개발,비교적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북쪽(19만4천㎢)에 비해 거의 2배의 땅덩어리(33만7천㎢)를 지닌 남예멘은 대부분이 불모의 황야와 사막으로 이뤄져있다.
사나를 떠난지 5시간 남짓,통일전의 국경마을 슈라이가에 도착했다. 분단국가기자의 당연한 호기심은 분단과 대치의 흔적을 찾는데로 쏠렸다. 79년의 대규모 국경분쟁을 비롯,수차례의 크고 작은 무력충돌의 자취와 탱크저지선ㆍ벙커 등 분단의 상징물을 찾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통일이 된 지난달 22일까지 남북예멘인의 통행을 가로막았던 북측검문소 자리에는 통행차단기가 걸렸던 기둥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도로에서 조금비껴난 언덕바지에 높이 1m가량의 철조망이 설치돼 있는 것을 발견,카메라를 들고 뛰어갔으나 사유지임을 표시하는 것이란 얘기에 실소를 터뜨려야 했다. 지난주까지도 검문소를 지키던 2개중대병력이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 철수하고 썰렁한 막사만 남아있었다.
남북예멘을 23년간 갈라놓았던 「분단의 장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무장지대격인 5㎞의 황야를 지나 도달한 남쪽의 검문소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차단기는 휘어진채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다. 남예멘 군인한명이 그늘에서 졸고 있다가 차가 서자 손을 흔든다. 총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채 철거하지 못한 막사등 시설물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양쪽 검문소사이에 있는 와디(사막지대의 바닥이 드러난 강,비가 오면 물이 흐르나 곧 메말라 버린다)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통일이전에도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왔다고 한다.
중무장한 백만명이상의 대군이 총부리를 마주한채 살벌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의 휴전선을 연상했던 기자의 눈에는 이같은 분단이 과연 분단이었느냐는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를 맡았던 예멘공보부 자마일(25)의 얘기를 들으며 부러움마저 들었다.
쿠웨이트유학시 남예멘출신의 부인과 결혼한 자마일은 방학동안 아덴을 수시로 방문했다. 우리식으로 보면 3국을 통한 「밀입남」인 셈이다. 그러나 양쪽 정부어디에서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북쪽의 콰다봐에 살던 모친은 아덴에 있던 자마일의 형이 10년전 해외근무를 떠나게 되자 아들의 집을 지켜주기 위해 아예 아덴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자마일 자신은 쿠웨이트에서 귀국한 후로는 당국의 남예멘방문허가를 받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1년에 한번 정도밖에 아덴의 모친을 방문할 수 없어 불편했다고 말했다. 지금 통일을 앞두고 있는 동서독도 이미 60년대부터 가족친지 방문을 허용했던데 비해 서신교환은 물론 서로간에 생사확인조차 못하고 있는 우리의 분단의 벽이 실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국경을 지나 남예멘을 들어서자 「사회주의는 승리한다」는 표어가 산중턱에 새겨져 있다. 아덴시에서도 각종 사회주의문구와 함께 하늘색바탕에 붉은별이 그려진 남예멘사회당의 깃발이 곳곳에 펄럭이고 있었다. 아덴의 사회당본부 건물위에 설치된 노동자의 단결을 상징하는 대형네온사인은 아덴의 밤거리에서 가장 현란함을 자랑하는 듯 했다.
아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시내곳곳에 설치된 국부이스마일의 초상화다.
압둘ㆍ이스마일은 남예멘사회주의 보수파의 거두로 86년 정변때 피살됐지만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고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이 내려지고 있는 아덴시내에서 골수 공산주의자인 그의 초상화만은 끄떡 없다. 북쪽에서도 그를 존경한다는 안내인 자마일의 설명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통일을 위해 노력한 위대한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예멘체재중 언제나 들을 수 있던 『예멘은 하나다』라는 말도 이스마일이 주창한 구호였다고 한다.
사나로부터 아덴에 이르는 아스팔트 도로는 하나로 뻗어있다. 분단으로 인해 시공을 달리한 흔적도 없이 그대로 연결돼 있다.
이도로의 공사는 한국과 중국기업이 나눠 맡았으며,현재도 현대ㆍ삼환 등 우리기업들이 예멘을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우리자신의 국토를 하나로 잇는 길을 닦게 될 날은 언제나 올 것인지,서글픈 심사를 억누를 수 없게 하는 예멘의 「통일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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