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영운 모윤숙은 고 노천명시인과 함께 해방전후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운의 시세계가 당초엔 자유분방한 정열을 영상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면,해방전후부터는 조국애와 민족애를 드높이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해도 좋다. ◆『장미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의 한 구절이다. 1950년 여름,모윤숙이 전쟁에 쫓겨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아직 더운 피가 가슴팍에서 쏟아지는 국군의 시체를 만난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애국시는 그 자리에서 즉흥시로 탄생됐다. ◆아무래도 모윤숙의 대표작은 「시몬」으로 시작된 산문시 「렌의 애가」다. 1939년 얄팍한 팸플릿으로 첫 선을 보인 「렌의 애가」는 출판되자마자 곧 매진됐다. 판을 거듭할수록 책이 두꺼워지고 독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중판이 거듭되어 오늘 현재 60판을 기록하고 있다. ◆모윤숙이 못내 그리워하며 애절하게 부르던 「시몬」은 누구인가. 춘원 이광수라는 데 이의가 없다. 모윤숙이 이전을 졸업하고 간도용정의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검은 머리 풀어」라는 시를 동광잡지에 기고했다. 이를 본 이광수가 모윤숙의 시재와 애국심을 칭찬,교분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춘원이 모윤숙과 같이 규전고원에 올라가 호수위에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저 구름을 잡지 못한다』면서 「영운」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모윤숙의 활동은 문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장면,김활란과 함께 유엔총회에 참석하는등 한국정부 수립을 승인받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1970년 세계작가대회를 서울로 유치,한국의 문학을 세계에 알렸다. 이밖에도 유네스코 제10차 총회 한국대표(58년) 아시아판공대회 한국대표(59년) 세계여성대회 한국대표(61년) 공화당 전국구의원(71년) 등 활동이 다채로웠다. 그처럼 폭넓은 문인이 다시 나타나기는 당분간 어렵겠다. 큰 별이 떨어짐에 충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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