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의 기습…“군수뇌부에 간첩” 설도/육참총장 댄스파티 만취 깊은잠/신성모국방,「일요 전화」 안받아/국군지휘부 마비… 공산당 조종 받았을 가능성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았다. 이 전쟁은 40년이 지났는데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부문이 많다. 도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진행됐으며 심지어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까지가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몇백만의 목숨을 삼켰는지와 그 많은 전쟁행방불명자의 일차조사도 돼있지 않다. 전쟁에 깊숙이 끼어들었던 미국은 지난 40년동안 6ㆍ25를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했다. 40년이 지난후 부시대통령은 『공산주의와의 첫대결이었던 용기 있는 전쟁』이라는 말을 썼으며 전쟁기념비도 40년후에야 워싱턴에 세우게 됐다. 적어도 2백만의 죽음을 몰고온 이 비극의 전쟁을 무엇이 「잊혀진 전쟁」「논란의 전쟁」으로 남게했는가. 40년전의 그 비참했던 전쟁스토리를 재구성하면서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비극의 매듭들을 8회에 걸쳐 들춰본다.【편집자주】
6ㆍ25가 40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전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첫째 전쟁의 한쪽주체인 북한이 전쟁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일체의 자료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둘째 이 전쟁은 남북한뿐 아니라 미국,소련,중공의 개입으로 얽혀있어 쉽게 자료의 연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련,중공으로부터의 자료는 이제야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2백40㎞로 뻗어있는 한반도의 남북분단선 38도선에서는 일시에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마침 30년만의 가뭄끝에 태풍 엘시호가 북상중이어서 6월24일밤은 약간의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벼락이 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맹수떼들이 일시에 포효하는 착각을 갖기도 했다. 30분정도나 이 폭음은 계속됐다. 곧 『까르릉 까르릉…』하는 금속성 굉음과 함께 한국군들 거의가 지금껏 한번 보지도 못했던 대전차부대들이 전선을 마구 짓밟고 넘어왔다.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일요일 새벽에 밀어닥친 이 기습공격은 같은 일요일의 공격인 1941년 12월7일의 진주만공격이나 1941년 6월22일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히틀러 나치의 공격과는 달랐다.
한국군은 미국같은 잠재력이나 소련같은 대응책을 전혀 갖지 못한 상태였다.
38선전역에는 남쪽으로 국군3개사단ㆍ1개독립연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바로 북쪽에는 평소 심심찮게 싸움을 걸어오던 북한의 38경비여단이 마주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6ㆍ25아침 T34탱크를 앞세운 2개군단 7개 정예사단이 38경비대를 뒤로 제치고 불쑥나와 일시에 전격공격을 가해왔다.
북한으로서는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처럼 완벽한 기습작전이었고,소련을 공격한 독일처럼 기갑부대와 항공기를 앞세운 완벽한 전격전이었다.
전쟁의 첫희생자는 국군이 아니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조사에 의하면 6월25일 새벽 지금은 남한지역으로 돼 있는 철원 북쪽의 마을에 살던 김기성이란 중늙은이가 요란한 군대이동모습을 보러 대문을 열고 나섰다가 남진인민대군에 의해 사살당했다. 이어 같은 동네의 안씨라는 40대 남자도 울타리밖의 변소에 가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이들은 38선 접경지역의 북한쪽 주민들이었다.
○7개사단 밀어닥쳐
38선에는 서쪽으로부터 웅진반도에 백인엽대령이 이끄는 국군17독립연대,개성문산방면에 백선엽사단장의 1사단,의정부연천지역에 유재흥준장의 7사단,춘천방면에 김종오대령의 6사단,그리고 강릉지역에 이성규대령의 국군8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지금 동서군사분계선에는 국군 15개여ㆍ사단이 배치돼있고 그것도 인원ㆍ장비면에서 6ㆍ25당시의 사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완벽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름으로 종종 간첩단이 내려와 후방을 어지럽히곤 했었다. 당시의 전력으로는 엄청난 과잉부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3개사단 1개 독립연대는 6ㆍ25직전까지 그런대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38선 북쪽에 배진하고 있던 북한 38경비여단들이 웅진반도,개성지구,춘천지구에 4월부터 대대규모까지의 전투를 걸어왔으나 김석원,김종오 등의 명지휘관들의 독전아래 이들을 성공적으로 격퇴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6월25일의 새벽은 달랐다.
38선 5∼10㎞ 후방에 배진하고 있던 전차를 앞세운 7개 사단이 일시에 밀어닥쳐 도무지 적수가 되지 않았다.
수도 서울을 곧바로 찌르게 돼있는 인민군주력 제3ㆍ4사단이 넘은 의정부방향은 특히 더했다. 그냥 밀고 내려 왔었다.
당시 인민군 105탱크여단의 정치장교(대위)로 있다가 후일 간첩으로 남파돼 귀순한 오기완씨(59)에 따르면 잔뜩 긴장한채 38선을 넘은 인민군전차장교들은 포천쯤에 와서는 『전쟁이 너무 싱겁지 않아』라고 말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또다른 인민군 공격 일선중대장의 말은 『쇠망치로 솜뭉치뚫는 격이었다』는 것이다.
국군 3개사단ㆍ1개 독립연대의 총병력은 4만명을 넘지못했는데 그것도 전쟁발발전날 부대병력의 3분의1이상이 농번기 휴가를 나가버려 3만이 채 안됐었다.
인민군은 일선공격부대만도 7개사단ㆍ1개여단에 10만을 넘었다.
무기의 차등은 병력수의 경우 보다 더했다. 인민군은 38선을 첫날 넘은 것만도 1백46대(육군전사)나 되는 T34탱크를 갖고 있었으며(한국군전무) 1백98대의 항공기(한국군22대),1백22밀리 곡사포 2백26문(한국군전무),36문의 고사포(한국군전무),각종 박격포(한국군은 6분의1보유)등 2차대전때 나치독일의 공격을 결국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레닌그라드 방어부대의 수준이었다.
그보다 더 비참했던 것은 군중앙지휘부의 마비였다.
전전선에서 인민군 정예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가운데도 육군본부 명령지휘계통은 오전 10시께까지도 성립되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소장)은 전날밤의 댄스파티로 술이 과해 곤히 잠을자는 바람에 6사단에서 용하게 걸려온 전면전 발발보고를 들을 수가 없었고,신성모국방장관은 『일요일을 방해받지 않는다』는 영국신사풍인가 뭔가 하는 이유로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어 연락이 되질 않았다.
전군의 작전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대령은 마침 며칠전 이사를 해 전화도 주소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헌병들이 막연히 아현동쪽이라는 것만 알고 사이렌을 울리며 이집저집을 찾아헤매고 있는 가운데 장대령은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마포어시장에 나가 있었다.
도대체가 그많은 38선무력충돌과 인민군남침정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완벽하게까지 방심할 수 있었는가.
6ㆍ25를 『이건 내가 치른 전쟁이오. 내전쟁이었소』라고까지 말하는 백선엽 예비역대장은 사실 개전초부터 휴전까지 3년 1개월동안 중요전투를 거의 독자적으로 이끈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의 전력은 인민군의 절반수준도 안됐지요. 그러나 그것이 기습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당하지는 절대로 않았을 것이오』라고 말하고 있다.
군수뇌부 어딘가에 완벽한 간첩행위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거의 일생동안 한국전연구를 해온 전국방부전사편찬위 간사 유관종씨(육군중령예편)는 북한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확실한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국방장관 신성모와 최고사령관 채병덕이 공산당원이거나 적어도 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신성모는 월북국어학자이자 골수공산당원인 이극노와 동향으로 절친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극노와 함께 공산당에 가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채병덕은 일본육사출신으로 공산당에 가입했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내가 대통령 될 사주가 있단 말이야』라고 말할 만큼의 허황성을 지닌 사람이어서 교묘한 공산당의 술책에 넘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총장부관 행적의문
채병덕은 갈월동의 총장관사에 나최광중위라는 부관을 두고 있었다. 이 나중위는 6월25일 새벽 춘천방면의 제6사단 7연대장 임부택중령의 「인민군 전면침략보고」 전화를 『곤해 주무시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바꿔주지 않은 인물이다.
나중위는 6ㆍ25이후 실종된 것으로 돼 있고 채총장의 부인 백경화여사는 그가 혼자서 총장관사를 지키다가 인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관종씨는 이 나중위의 신원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국군 장교명단에 이름마저 없어 이자가 바로 군기밀을 탈취해낸 인물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고 있다.
군 숙군작업은 한때 공산세력에 동조했다가 반공쪽으로 돌아선 박정희대위(당시)의 정보제공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는데 정보의 한계성에 비춰볼때 아마도 군고위층의 어딘가에 적색선이 살아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6월25일 새벽쯤에는 국군이 가장 깊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고 인민군은 바로 그허를 예리하게 찔렀다.
그허의 첫째는 인사상의 것이었다.
49년10월 「명태사건」으로 쫓겨났던 채병덕이 50년 4월10일 어떻게 해서인지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재취임한후 6월10일 전사단장을 포함한 육본작전국장등의 중요직책을 갈았었다.
명태사건은 채병덕등이 북한에 시멘트,전선 등의 전략물자를 넘겨주고 그 대가로 명태를 받아 이를 판매해 돈을 벌고 있던것을 김석원이 1사단장을 맡으면서 이 밀매교역을 중단시킨 사건이었다. 김석원은 명태를 모조리 압수해 장병들 부식으로 나눠주든가 팔아서 군비에 충당했던 것이다. 이때 채와 김은 모두 물러났었다.
6월10일의 인사이동은 이형근이 8사단장에서 2사단장으로,유재흥이 2사단장에서 7사단장으로,김종오가 1연대장에서 6사단장으로,장창국이 참모학교부교장에서 작전국장으로… 등이었다.
도무지 업무파악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인민군 남침을 맞았다.
둘째는 비상경계령 해제
육군본부는 5월1일의 메이데이를 대비,4월17일부터 5월3일까지 경비경계령을 내렸고 5ㆍ30총선에 대비,5월9일부터 6월2일까지 경계태세령을 내렸으며 북한의 동정이 심상치 않자 다시 6월11일 16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있었다.
○6월23일 경계해제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육본은 6월23일 12시를 기해 모든 경계령을 풀고 장병들을 농번기 휴가를 보냈다.
셋째는 장비수리의 문제.
육군본부는 4월부터 군의 모든 장비를 수리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각종 차량,대포,심지어 기관총까지 포함돼 있었다.
6ㆍ25의 그날 후방사단에는 거의 모든 차량이 부평의 병기창에 수리차 나가있어 기동력이 전무했고 일선부대들도 상당량이 수리검사를 위해 차출돼 있어 기동력,화력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6월22일 미군의 마지막부대가 전차와 함께 철수했다.
그러나 다른 한면에서는 육본인사이동이나 중앙지휘부의 마비가 개전초의 패전이유전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비록 백선엽장군의 말대로 충분한 응전준비를 하고 있었다해도 국군은 패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점곤박사(경희대명예교수ㆍ예비역소장)는 6ㆍ25는 소련이 계획한 전쟁이었고 소련이 지휘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한국군 몇개사단으로서는 처음부터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한이 탱크전을 해 본 경험이 없고,더군다나 한반도를 점령할 수개군단규모의 전쟁계획은 당시 자체힘으로는 도저히 세울 수 없었다는 것.
인민군 제2군단 공병참모겸 고급노어통역관으로 6ㆍ25남침의 선봉에 섰으며 소련어로된 작전명령을 한글로 번역했던 주영복인민군소좌(뒤에 귀순)는 인민군제2군단의 「소련고문선생들」은 전선에서 오는 승전보를 번역해 올릴때마다 『하루소 하루소』(좋아 좋아)를 연발했다고 뒤에 증언했다.
이날 새벽4시. 전38선에서 30여분이나 터뜨렸던 그 무서운 파열음은 공격개시를 알리는 소련식 특유의 신호였다. 소련군들은 코사크병법에 따라 공격개시전 중포를 일시에 터뜨려 적을 위압하는 전술을 써왔는데 바로 이 전술은 뒤에 인민군이 6ㆍ25를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하게한 패인이 되기도 했다.【정일화 북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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