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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지표/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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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지표/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0.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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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 본란 「통일국가상」(5월26일자)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생각밖에 많았다. 재일통일일보의 창간 발행인 이영근씨 (5월14일작고)의 남다른 정치경력과 통일이론을 소개한 그 칼럼에 대하여,고인을 벗했던 이들과,처음으로 고인의 존재를 알고 관심을 갖게된 독자들로 부터 연락과 문의가 있은 것은 예상대로였지만,「통일국가상」이란 발상자체에 위화감을 느끼는 듯한 반응이 여러건 있은 것은 좀 뜻밖이었다.그런 반응들은,내가 이해하기에,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욕구이며 과제인데,새삼 「통일국가상」을 설정하는 것은 통일과업에 제약이 된다는 것과,지금 형편에 「통일국가상」을 말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등 두 갈래인듯 했다. 「통일국가상」은 흡수통일론과 통한다. 그런 전제를 붙이는 것은 통일을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특히 전화를 걸어 온 독자들에게는,통일을 논한 글 2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긴 설명을 대신했다. 그 하나는 김상협전고려대총장의 명강 「수정주의의 시대」 (71년9월18일ㆍ고대신문사 「민족과 대학」 73년ㆍ김상협 「지성과 야성」80년 소수),다른 한편은 연세대 안병영교수의 「이데올로기의 극복­냉전시대의 청산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월간조선」 82년1월ㆍ안병영 「현대공산주의연구」 82년 소수) 였다. 이영근씨의 「통일국가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김총장의 통일론과,이들과는 한 바퀴 연배가 아래인 안교수의 80년대 통일론을 함께 읽어보면,「통일국가상」의 발상이 통일론의 한 시발점이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워낙에 알려진 얘기지만,김총장은 재직중 해마다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학술강연회에 특강을 베풀어 많은사람의 귀를 쫑긋하게 했었다. 「수정주의의 시대」는 그 첫해의 강연록인데,이영근씨의 「통일의 개념정립과 통일후 국가상의 범주」(「통일」 72년3월)와 마찬가지로 이미 7ㆍ4공동성명 이전에 나온 통일론임을 주목할 만하다.

이 강연에서 김총장은 미ㆍ중공 화해로 절정에 이른 수정주의와 데탕트의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그틀안에서 가능한 통일방안을 모색한다. 그 결과 한반도의 남과 북 어느 한쪽에 의한 일방적인 통일은 물론,남과 북이 서로 이데올로기의 「성역」을 고집하는 한,합의에 의한 통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분단이전 상태로의 환원을 뜻하는 복고적 통일」「분단사실이 있었다는 사실 그자체를 부인하는 비역사적 통일」「남ㆍ북의 성역을 그대로 놓아둔채로의 모자이크적 통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김총장은 남ㆍ북이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광장」을 상정한다. 「북쪽도 반드시 그 곳을 향해 오지 않으면 안될 광장」 ­바로 「자유복지사회라는 광장」이다. 거기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인 통일의 길이란 것이다. 그 것은 재통일(re­unification)이 아니라,신통일(new unification),새로운 국가건설(new nation building),「새로운 국민형성」의 길이다. 이처럼 과거지향적 현상유지적이 아닌 미래지향적 역사창조적인 새로운 통일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교수에게 있어서 김총장의 「광장」은 「더욱 개방된 민주사회,배분적 정의가 실현되는 복지사회」이다. 통일을 위하여 승부보다는 타협을 전제로한 남ㆍ북의 대화가 있어야 하고,북방외교를 포함한 국제환경의 유도가 필요하지만,『오히려 중요한 것은 통일된 사회의 미래상­그것이 아무리 불투명할지라도­을 좇아 우리사회를 하나하나 쇄신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 내면으로부터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받고,국제적인 폭넓은 지지를 흡수할 수 가 있다. 이쯤되면 북한도 대남혁명전략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동ㆍ서독과 같은 남ㆍ북 관계의 전개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분단상황의 이데올로기적 극복의 문제는 결국 힘을모아 우리체제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문제로 회귀한다』「남북을 관통하는 새로운 국민형성」이 그 과제로 된다.

이상의 「복지사회」나 「민주사회」가 「통일국가상」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합의 가능한 통일의 미래지표,남ㆍ북이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하고 이로부터 통일방안을 연역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점은 왜 통일을 하느냐,무엇을 위해 통일을 하느냐를 먼저 생각하고,그 근거위에서 어떻게 통일을 하느냐는 통일방안을 도출하는데 있다. 그리하여 먼저 합의가능한 통일의 지표를 제시하고,이를 바탕한 평화정착과 공존,협력과 통합,민족동질성 회복 등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 지표에 도달하는 것이 통일이며,그것이 오활한 듯 하지만,가장 확실한 통일방안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통일을 하자면,합의 가능한 통일지표­민주사회ㆍ복지사회­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남도 변하고 북도 변해야 한다. 민주화가 곧 통일의 명제로 되는 것이다. 때문에,통일을 빙자하여 민주화를 후퇴시킨 유신,선통일을 앞세워 민주질서를 뛰어 넘는 심정적 무조건 통일론은 반통일로 규정이 된다. 폐쇄적인 체제를 고수하려는 북의 태도 역시 그러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로서는 통일을 향해 주체적으로 변화해 가면서,우리의 변화로써 북의 변화를 유도하되,그들 역시 주체적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할 도리 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통일지표에 먼저 이르러 저들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같은 이치로 생각하면,통일에는 달리 호수가 없다. 풍선이 터지듯 갑자기 통일이 오지는 않는다. 이를 외면한 호수찾기,풍선터뜨리기의 통일 노력 탓으로,우리는 금방 통일이 될 듯한 열망을 부풀렸다가는 이내 실망하곤 한다. 그 두드러진 보기가 7ㆍ4공동성명 뒤의 10월 유신이었다. 바로 그 7ㆍ4성명에는,통일의 방법만 있으되,통일의 지표는 없다.

지금 우리는 한소 정상회담으로 하여,다시금 통일열망을 부풀리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모스크바로 돌아서 평양으로 간다는 말을 백번 수긍하지만,들뜰 것은 없다. 이런때 일수록 통일의 마지막 큰 길은 어디까지나 민주화에 있는 것임을 되새겼으면 한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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