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칼럼을 쓴지도 2년이 가깝다. 쓰면 쓸수록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칼럼쓰기의 모험과 겸연쩍음을 더욱 실감하게된다. 이쪽은 마치 벌거벗은 기분으로 조여오는 마감시간에 쫓기듯 글을 쓴다. 하지만 다른쪽에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읽지않을 자유도 있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있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얼굴들 앞에 자신을 가능하면 피부에 닿도록 생생히 드러내야 하는 직분의 고약함을 누구나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지난달 중순 「천형의 짐」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다음날 어느독자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글은 5ㆍ16이 역사로 정리되기에 앞서 아직도 우리에게 천형의 짐이 되고 있다는 요지였는데,못마땅히 여긴 이름밝히길 거부한 그 독자는 비뚤어진 당신글이야 말로 「천형의 붓」이라고 대갈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름이라도 밝히면 서로간의 다른 생각을 토론해 볼 수도 있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니 질책을 일방적으로 듣는 것만으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천형의 붓이라는 소리는 필자의 귓전을 맴돌았다. 따지고보면 남의 비위나 건드리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직분이야말로 이 무슨 팔자소관인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때도 있었던 것이다.
지난 2월 타임지가 프로필란에서 미국최고의 칼럼니스트로 대서특필했던 「월리엄ㆍ사파이어」에 관한 글을 읽었던 생각도 난다. 생동감있는 감각과 박학,가시돋친 어휘구사로 사실과 의견을 절묘하게 엮어 17년째 뉴욕타임스에 주2회 칼럼을 쓰고 있는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낸시ㆍ레이건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를 가리켜 「인정없고,우둔하고,악의적이며,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매도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파이어자신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분」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글의 소재나 내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타임지는 소개했었다.
그러고 보면 가끔 분에 넘치는 격려와 관심을 보여준 독자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족하고 겸연쩍은 글을 축조심의라도 하듯 읽고 공감을 보내주거나 글의 소재를 전해준 독자들이 떠 오른다. 5공청산문제로 국론이 마구 찢겨져 있을 때 떡장수 할머니와 호랑이의 고사를 필자에게 상기시켜 「호환의 정치」라는 칼럼을 쓰게했던 분,부산을 「영원한 강골의 꼬방동네」라고 썼던날 형제들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기로 했다고 전했던 젊은 독자분,「진짜 기능공」이라는 글을 읽고 전화를 해준 원로교수등등…. 「백팔번뇌」나 「이사야의 예언」을 쓴 다음날에는 불교신자냐는 물음과 기독교장로냐는 전화가 거의 동시에 걸려 오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일보가 내일이면 창간 36돌을 맞는다. 그많은 독자들의 성원속에 정상에 다가선 오늘의 보람이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조그만 이 칼럼도 그동안 애써 찾아 읽어주고 더러 질책을 마다하지 않은 독자들로 인해 오늘에 이어져 왔음을 새삼 절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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