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ㆍ외교분야만 통합작업 분주/열기식자 관제집회 무드조성/경제파탄 남측 사실상 투강… 북측 포용력 돋보여통일예멘의 수도 사나의 분위기는 뜻밖에 무덤덤하기만했다. 분단 72년만에 통일을 이룩한 나라의 표정이 너무 시큰둥해 처음으로 찾아온 분단국가 기자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사나시가지 곳곳에 내걸린 적백당의 통일예멘국기와 통일축하플래카드들은 시들은 화환처럼 초라해보였다. 오색전등이 현란하게 불을 밝힌 중심지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얼굴에는 생활에 쫓기는 그늘만 엿보일 뿐 환호작약하는 감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멘정부는 통합선포주간의 주말인 5월24일을 국경일로 지정,25일까지의 연휴를 통해 통일을 자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환호하던 북예멘인들의 열기도 잠시뿐 하루만에 표정이 시큰둥해지자 정부는 관제집회로 무드를 조성해야 했다.
바그다드에서 사나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한 예멘대학생은 『통일이 돼 좋으냐』는 질문에 『좋다』고만 대답할 뿐 왜 좋은지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이같은 반응은 사나에서도 나타났다. 예멘인들에게는 체제의 선택ㆍ형태등 정치적 문제보다는 당장의 생활고 해결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분주히 돌아가는 곳은 통합작업이 한창인 군부와 외교분야등 몇곳뿐이다.
통합선포에 앞선 5월20일 양국군대의 통합선포로 지금 남북예멘에서는 재배치계획에 의한 군의 대규모이동이 한창이다.
외교통합도 분주하다. 남북에 모두 외교관을 파견했던 나라들이 본국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쪽의 공관을 철수하고 있다.
3일만해도 중국ㆍ체코등 4개국 사나주재대사의 환송연이 한꺼번에 베풀어졌다.
통합의 성패는 앞으로 30개월간의 과도기동안 이뤄질 정치와 경제,즉 내정통합성공여부에 달려있다. 과도기설정문제에 대해 남예멘은 사회주의통제경제체제를 자유시장제에 접목시키기 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4년을 과도기로 요구한 반면,북예멘은 1년을 제시,이를 절충한 끝에 30개월로 정했다.
이와 관련,이번 통합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남예멘측의 「국공합작」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에 비해 2배의 원유매장량을 지닌 남예멘이 과도기를 통해 경제를 회복시킴으로써 북을 압도하는 「사회주의 예멘공화국」을 수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다.
이런 주장은 통합발표시 지난 80년 남예멘정부가 소련과 체결한 20년간의 해군기지사용권협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는데서도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통합작업에서 가장 눈여겨지는 부분은 북예멘측의 관용적인 포용력이다. 인구 2백70만의 남쪽에 비해 거의 4배의 인구를 가진 북쪽은 경제파탄에 직면한 남예멘의 일방적 「투항」이 분명한데도 동등한 입장에서 통합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숙함을 높이 살 만하다.
동 서무역의 중개지로 최고의 부를 쌓은 시바여왕의 나라,아랍국으로서는 드물게 온화한 기후와 풍토로 「아라비아 펠릭스」 (행복한 아라비아)로 불린 예멘이 근세이후 세계빈국으로 전락한 현실이 통일을 이룩한 공통분모로 작용했다. 예멘이 통일논의 18년만에 비원을 이룩한 것은 우리나라에 비해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높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남북지도부의 뿌리는 한군데에서 출발했다.
60년대 나세르등 이집트 청년장교의 애국민족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북예멘청년장교클럽이 태동했는데,이들이 왕정과 식민통치타파를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켜 북예멘에 공화정을 수립했다. 60년대 제3세계를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에 고취된 북예멘 지도층은 아랍권 유일의 공산정권인 남예멘과 이념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노선이었다.
그러나 북예멘은 혁명에서 비롯된 7년 내란에 휩싸여 통일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왕정파를 지원한 사우디,영국등 수구세력과 공화파를 위해 군대까지 파견한 이집트등과의 분쟁으로 예멘은 다시한번 국제대리전의 전화에 휘말리고 말았다.
양국간의 첫 통일논의는 72년 11월 트리폴리에서 이뤄졌다.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한 양국정상은 통합헌법에 합의했으나 실무적으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되풀이되는 쿠데타 때문에 양국 정권의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데다 대국민선전용 통일공세에서 비롯된 불신과 반목이 극심했던 탓이다.
대립은 결국 79년 국경분쟁이라는 무력충돌로 발전됐다. 그러나 친중국노선의 나세르 남예멘대통령이 실권자로 등장,서방과의 관계증진ㆍ시장경제도입등 개혁조치를 취하면서 통합논의에서도 크게 양보,통일헌법이 밑거름이 된 아덴협정을 82년에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86년 개혁조치를 둘러싼 남예멘지도부내의 유혈사태로 예멘의 통일작업은 다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때 사태를 수습한 인물이 현예멘부통령 알리ㆍ살렘ㆍ알비드(남예멘 사회당서기장)이다. 친소노선의 알비드는 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를 강력히 지지해 남예멘판 「페레스트로이카ㆍ글라스노스트」를 착실히 추진,88년 양국국경지대의 유전을 공동개발키로 합의함으로써 경제협력 시대를 열었다.
이어 88년 7월 1일의 양국간 여행자유화조치로 통일의 기운은 급속히 무르익었다.
이같은 급진전의 배경에는 남예멘의 속사정도 깔려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파탄으로 수만명의 남예멘인이 허술한 국경을 넘어 북으로 「대량탈주」한 것이다.
탈주자의 대부분이 의사나 기술전문직등 고급인력이었다. 결국 「자동차 하나 고칠 정비공마저 없게 된」 남예멘은 서둘러 통합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최근의 화해무드로 인한 남예멘의 전략적 가치감소와 이에 따른 소련지원의 감소도 남예멘의 경제파탄을 재촉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89년 11월 30일 아덴에서 회동한 알리ㆍ압둘라ㆍ살레 북예멘대통령(현대통령)과 알비드서기장은 더이상의 분단은 「예멘인의 고통을 더할 뿐」이라는데 합의,오는 11월 예정됐던 통합일자를 6개월 앞당겨 선포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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