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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유혈1년… 중국의 오늘(특파원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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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유혈1년… 중국의 오늘(특파원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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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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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은 중국근대사의 최대참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천안문사태가 발생한지 1주년이되는 날이다. 지난해 4월15일 호요방전총서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불이 붙었던 중국민주화운동은 1달반여 동안 중국대륙 전체를 뒤흔든 끝에 6월4일 중국당국의 유혈 진압으로 일단 막을 내렸었다. 그러나 1년이 흐른 지금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의 미래진로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중국지도부와 민주화운동지도 인사들은 모두 중국인민들에게 설득력 있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중국당지도부와 민주화운동인사들의 지난 1년간의 움직임과 오늘을 살펴본다.◎정정 어떻게 변했나/「집단지도제」전환… 표류상태/중전회 이례적 「3회소집」… “아직도 불안”/온건ㆍ개혁파 대세장악 여부가 향후관심

그동안 중국공산당은 중앙위 전체회의를 3차례나 소집했고,7ㆍ8월께 또 한차례 회의소집이 예정돼 있다.

예년같으면 한해에 1∼2차례 열리는 것이 상례였으나 지난 1년사이에 3차례나 회의가 열린 것은 그동안 국내외 정세가 급변했고,의논해야 할 난제가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권력자 한두사람의 뜻대로 모든 일이 좌지우지되던 상황은 이미 끝났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고 있다.

3차례의 회의는 소집시기와 방식ㆍ의제 토론과정등서 「집단지도체제」성격이 분명히 드러났다.

실권자 등소평은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뒤에도 당분간 막후조정역할을 계속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후에 대비,강택민총서기를 중심한 집단지도체제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등소평자신 6ㆍ4이후 뚜렷한 당의 진로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당내 영향력이 감소된 가운데 처음시도되는 집단지도제는 지난 1년간 중국을 마치 방향타 없는 배처럼 끌고 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60년대 모택동시절의 사상ㆍ이념투쟁과 뇌봉학습운동이 전국을 휩쓰는 가하면,개혁ㆍ개방까지를 다짐하는 구호가 뒤섞여 바깥세계에서는 얼핏 종잡기 어려운 불투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불투명한 중국의 국내정정을 이해하는데는 그때 그때의 미세한 변화의 조짐들보다 지난1년 동안의 3차례 중전회의 소집배경과 결정 내용등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조자양의 실각과 작년 6월 23,24일 이틀간 소집된 13기 4중전회는 보수극좌세력이 대세를 완전 장악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당중앙의 최고지도부가 개편됐다.

조와 호계립 예행문 염명복 등이 정치국 서기처,심지어 중앙위원회에서 까지 축출되고 대신 강택민 송평 이서환이 정치국상위에 정관근이 서기처에 입성했다.

당시 강경보수파는 중앙위원을 포함한 대규모 숙청을 시도했으나 등소평이 저지했으며 다른원로들과 「모든 쟁론은 최소한 2년동안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는데 합의,일단 강택민을 중심한 집단지도제를 출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중전회에서 조의 실각이 공식결정되기까지 당서기직을 대행했던 이붕(정치국상무위원)은 조와 온건ㆍ개혁파의 숙청을 서둘렀다.

5중전회 4개월 남짓 후인 작년 11월6일 소집됐다. 계엄으로 사회질서가 잡혔다지만 파탄지경에 빠린 경제문제 때문에 도처에서 불만의 소리가 높아져 당지부는 경제정책 노선을 놓고 심한 의견대립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10월중순에 열리리라던 5중전회는 한달이상을 끌고 이에 앞서 두차례의 정치국 확대회의,또 10월30일∼11월3일에는 중앙공작회의까지 소집,「당면경제 문제에 관한 연구와 토론」을 거치기까지 했다.

5중전회에서 통과된 「치리정돈을 강화하고 개혁을 심화하는데 관한 당중앙의 결정」은 이런 진통끝에 나온,강경파와 온건파,보수파와 개혁파간의 타협안이었다.

이 회의끝에 발표된 「공보」는 조자양처리문제를 한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극좌파는 조타도를 앞세워 개혁과 개방을 부정하거나 사상ㆍ이념의 강화를 구실로 경제난을 은폐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지적됐었다.

다만 당시 정치적분위기가 여전히 살벌한 가운데 경제정책결정권을 이붕과 요의림이 장악한채 치리정돈을 앞세운 중앙집중계획 경제를 주조로 하고 개혁의 심화는 구체적 정책 뒷받침이 없는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당총서기 강은 5중전회를 통해 당중앙조사위 주석직을 겸하게 돼 제3세대 지도부의 핵심으로 당내권력 기반을 강화하게 됐다.

그뒤 다시 4개월만인 금년 3월9∼12일의 6중전회는 국내외정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가운데 소집됐다.

경제난은 그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붕경제팀은 88년말부터 시작한 긴축경제로 인플레가 9%수준까지 떨어지고 반면 공업생산은 다소의 회복세를 보이며 금년중 경제성장률 5%달성을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긴축경제속의 자금난,기업 생산성저하,실업의 증가와 이에 따른 시장침체는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

정부통계는 실업률을 2.6%로 밝히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4%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치리정돈정책이 거센 반발에 직면하자 이붕은 가중되는 압력을 피하기 위해 새삼스레 개혁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거 조자양의 참모진이었던 경제체제개혁위는 해체되지 않았을뿐 아니라 금년초에는 6ㆍ4사건후 처음으로 회의를 소집,개혁ㆍ개방정책과 노선을 새로이 강조하기까지 했다.

6중전회가 열리기전 몇달사이 동유럽에서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등 거대한 변혁이 잇달았다.

국내 경제난과 사회주의제국의 연쇄봉괴속에 소집된 6중전회는 「당과 인민대중의 연계에 관한 당중앙의 결정」을 통과시켰다.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중국공산당이 새삼 대중의 중요성을 정면 거론한 것은 그동안 당이 대중과 유리돼 왔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란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6중전회폐막후 발표된 「공보」에서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빠져버린 사실도 관심을 끌만하다.

지난 4월이후 당이념선전 담당총책임자 이서환은 「일부 극좌적 사조」를 비판했다.

이는 특히 최근 들어서는 6ㆍ4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학생들에게만 모든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붕의 이름을 직접 들먹이며 「공격」한 것으로까지 보도되고 있다.

6ㆍ4사건후 지난 1년간의 중국국내 정정의 변화추세와 최근의 이런 사실들을 관련시켜 볼때 당정지도부내 세력권에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국내경제난과 국제적인 민주화 변혁의 압력에 밀린 그같은 변화가 사실이라면,남은 것은 온건ㆍ개혁파의 대세 장악이 끝까지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인지 또 그 시간은 얼마나 걸릴것인지가 관심사이다.

◎시위주역들 뭘하나/대부분 피체… 수백명 미ㆍ불서 활동/「민주여신호」실패등 실적은 미미

작년봄 북경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대부분이 검거됐으나,현재 수백명이 서방각국에 도피,반체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엄가기 오이개희 채령 등 이제는 세계적 지명인사가 된 사람들을 포함한 해외도피자의 대부분이 광동­홍콩을 연결하는 「지하통도」를 이용,탈출과 망명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홍콩내 최대조직 「중국애국 민족운동지지연맹」(민지련)은 지난 1년동안 화교들의 기부금,대중모금활동 등으로 3천만 홍콩달러(3백90만미달러)이상을 모아 이들을 지원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망명자들은 프랑스 미국 호주 스위스 캐나다 등 구미각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데 해외반체제운동의 중심지로는 역시 프랑스와 미국 두나라가 꼽힌다.

그러나 서방세계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중국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은 적어도 현재까지로는 효과적인 운동조직을 만드는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작년 9월 결성,파리에 본부를 둔 「민진」은 「화려한」구성인물과 거창한 조직으로 서방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출범,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불붙이는 역할을 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았었다.

파리의 민진본부는 정치학박사 엄가기를 주석으로,부주석에 오이개희(전북경대학생 자치련주석),비서장에 만윤남(전서통공사사장) 등의 지도부아래 진자명(전북경사회과학연구소장) 진일자(전경제체제개혁연구소장) 하가동(전북경경제주보총편집) 등 지명인사를 포함해 9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그러나 민진의 지금까지 활동은 방향감각이 없이 표류,북경정권에 아무런 타격이나 자극도 주지 못했다는 평가들이다.

최근 실패로 판가름난 「민주여신호」는 표류하는 민진의 한 본보기로 지적되고 있다.

중국본토 가까운 공해에 방송선을 띄워 민주의 메시지와 바람을 대륙에 불어넣겠다던 민주여신호는 지난 3월 프랑스를 떠났으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모는 계획을 포기,지난 29일 대만의 한 기업인에게 50만미달러에 팔려버린 것으로 보도됐다.

민주방송선 계획에 앞서 작년 10월이후 민진이 벌여온 대중국 「자유의 팩시」보내기 캠페인도 초기의 기세와는 달리 실패로 끝났다.

당면한 목표설정과 방향제시보다는 인물위주로 가시적인 효과만 노리는 캠페인은 이제 중국내 민주화운동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외면을 받고 있다.

또한 아무리 국내에서 큰 일을 하던 지식인ㆍ학생들도 일단 외국으로 망명하면 스스로도 놀랄만큼 국내문제를 쉽게 잊어버린다고 한다.

작년 6ㆍ4사건당시 천안문광장 봉기총지휘부의 주석을 맡았던 대학생지도자 채령이 지난 4월 9개월만에 파리로 탈출했을때 한차례 뉴스 각광을 받았으나 곧 잊혀져 버렸다.

6ㆍ4사건후 저명주모자 수배명단에 올랐던 이록(24ㆍ전남경대생)를 포함,3백여명의 미국망명자들은 파리의 민진에 비해 조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효과가 없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아시아워치등 인권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세미나와 6ㆍ4사건 진상을 밝힌 책자저술등 활동 이외에도 미의회의 미중국관계 청문회에 참석하고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활동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

미국내 중국유학생의 체류연장조치등 이들의 활동이 큰 압력이 됐다는 후문이다.

지난 1년간 해외망명자들의 활동이 중국국내에서 별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비해 왕단(25ㆍ전북경대 학생자련주석) 유효파(전북경사범대교수) 등 국내 수감자들은 여전히 학생ㆍ지식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왕단은 작년 천안문광장 농성때 단식등 극한투쟁에 반대,온건하고 신중한 주장을 펴면서도 일단 단식농성이 결의되면 앞장서 단식에 참가하는등 인각적인면과 정치에 대한 식견등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북경=유주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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