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통상조약ㆍ노일전쟁후 소 영사관 철수/분단후 단절… 해빙무드 KAL피추후 또 냉각/작년 무역사무소 개설이어 연초 영사처설치▷해방이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전 한소관계는 크게 조선ㆍ러시아의 수교통상조약체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수교통상조약체결 이전의 양국관계는 우연한 접촉만 있었을 뿐 두드러진 사건은 없었다.
최초의 조우는 원나라의 정종즉위식때 축하사절로 간 고려 고종의 두 왕자가 러시아의 에르슬라프 대공을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1884년 조로 수교통상조약이 체결된후 일본세력을 피해 조선의 고종이 거소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노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1910년 한일합병을 하자 러시아영사관은 서울에서 철수한다.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선 소는 2차대전말미의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분단을 미영과 결정했으며 종전직전인 45년 8월9일 대일선전포고로 한국문제에 간여키 시작했다.
▷냉전시대◁
해방후 우리와 소련과의 관계는 분단,6ㆍ25등과 얽혀 적대적 상태에 있었다.
45년과 46년 연이어 열린 모스크바 3상회담,미소공동위는 이념대립등으로 한반도를 분단시켰고 소는 48년 10월 북한을 승인함으로써 우리와는 등을 돌렸다. 이어 소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침,동족상잔의 6ㆍ25를 일으킴으로써 한소관계는 그후 20여년간 전혀 접촉도 용인되지 않는 냉각상태였다.
▷변화모색기◁
70년대 들어오면서 세계정세는 미소간 데탕트,비동맹국가들의 등장등으로 해빙분위기를 나타내면서 한국의 외교방침도 선언적 차원에서 이념적 경직성을 탈피하기 시작했다.
71년 김용식 외무장관이 국회에서 『소련이 우리에 적대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한데 이어 박정희대통령도 72년 비적성 공산국과의 교류 허용방침을 천명했다. 소련도 「아시아집단안보」의 창설을 제창하면서 한국의 회원가능성을 시사해 미세한 변화가 시작됐다.
한국의 대소 방침완화는 78년 KAL여객기가 소련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을때 소련정부의 우호적 협조로 원만히 해결되면서 가속화될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경제력ㆍ정치력 등 모든면에서 소련이 절실하게 필요로한 대상이 아니었기에 양국관계는 크게 진전될 수 없었고,거기에다 83년 KAL747기가 소련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승객 2백69명 전원이 참사하는 비극으로 양국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적극적 교류추진기◁
KAL기 참사로 악화된 양국관계는 「외교엔 영원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88올림픽을 전후한 막후교섭,체육인들의 교류 등에 의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88년 8월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후 우리경제의 활력과 소의 개방화추진을 「외교채널마련」이라는 공통분모를 이끌어 냈다.
88년 7월 노태우대통령이 대북ㆍ동구와의 획기적 개방을 포함한 「7ㆍ7선언」을 발표한데이어 고르바초프가 그해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과 11월의 인도 방문에서 한반도 긴장완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우호관계 수립을 위한 화답이 오갔다.
이어 계속된 양국정치 지도급인사들의 우호적 제스처와 박철언 전정무장관등의 막후 교섭에 힘입어 89년 4월 양국무역사무소가 교환설치 됐다.
이후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를 비롯,정ㆍ재계인사에서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방소 러시가 일어났으며 89년 7월과 11월의 양국영사관계 협의끝에 90년초 양국간에 영사처가 설립됐다. 공노명 초대영사처장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이 3월에 방소,양국은 급격히 외교관계 수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이영성기자>이영성기자>
◇한ㆍ소관계 일지
▲원나라 정종즉위때 최초 만남=1246ㆍ7
▲조선ㆍ로 수교통상조약체결=1884
▲아관파천=1896
▲얄타회담에서 미 소 영 한반도분단 결정=1945ㆍ2
▲소의 북한승인=48ㆍ10
▲박정희대통령의 6ㆍ23선언=73ㆍ6ㆍ23
▲KAL기 무르만스크 불시착=78
▲KAL747 소전투기에 의해 격추=83ㆍ9
▲노태우대통령의 7ㆍ7선언=88ㆍ7
▲소련 서울올림픽 참가=88ㆍ9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88ㆍ9ㆍ16
▲노대통령 UN에서 동북아 평화강조연설=88ㆍ10
▲한소 양국무역사무소 교환=89ㆍ4
▲영사처교환설치 회담=89ㆍ7ㆍ11
▲양국 영사처교환 설치=90ㆍ3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 방소=90ㆍ3
▲유종하ㆍ오브민스키외무차관 뉴욕에서 접촉=90ㆍ4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정상회담=90ㆍ6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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