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묘 훼손에 10만명 규탄/모방범죄 확산… 정치쟁점 비화「망명자의 천국」이라고 불릴만큼 개방적이고 높은 인권의식을 자부하는 프랑스가 최근 인종차별주의의 회오리에 휘말려 온 나라안이 떠들썩하다.
인종차별주의 바람은 지난 10일 북동부 아비뇽 근교의 카르팡트라스에 있는 유태인의 묘지가 무참하게 훼손된 사건을 계기로 돌풍처럼 프랑스 전국을 휩쓸고 있다.
유태인이 최초로 프랑스에 이주한 지역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카르팡트라스의 유태인 묘지에 있는 34기의 무덤이 파헤지거나 장식물이 파손됐다. 일부무덤은 부장품이 도난됐고,독일어로 된 『유태인 꺼져라』 등의 구호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됐다.
더욱 끔찍한 장면은 2주일전에 매장된 81세 노인사체가 쇠꼬챙이로 난도질을 당한 것이었다.
이같은 반인륜적 행위에 경악한 프랑스인들은 14일 파리에서 10만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인종차별주의를 규탄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주요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미테랑대통령 부부까지 참여했는데,프랑스대통령이 거리시위에 참여한 일은 2차대전 승전퍼레이드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시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같은 시간에 파리근교에 있는 한 유태인묘지에서 또다시 무덤훼손사건이 일어났다.
또 같은날 보르도 인근지역에서는 학생들에게 유태인묘지 훼손사건은 「인종차별적 범죄」라고 가르쳤던 여교사가 괴한에게 피습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카르팡트라스사건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는 10여건의 유사한 유태인묘지 훼손사건이 잇달았으며 심지어 이탈리아,스웨덴,이스라엘에서도 모방 범죄가 일어나 반유태주의가 전염병처럼 유럽전체로 번지는 양상이다.
지난 16일 프랑스 부르타뉴지역에서는 기독교인 묘지 90여기가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경찰은 이른바 「스킨헤드」로 불리는 극우주의자 청년 3명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범행을 유태인들의 소행처럼 위장,반유태인 감정을 촉발하기 위해 현장 부근에 인종차별을 비난하는 낙서를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경찰은 미테랑대통령의 엄명에 따라 유태인묘지훼손 범인색출에 전력을 쏟았지만 신나치주의자나 극우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측하고 있을뿐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태인묘지 훼손사건은 즉각적으로 정치문제로 비화됐다.
주요 정치지도자나 프랑스 언론들은 일단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공공연히 인종차별감정을 고취시켜온 극우보수주의 정당인 국민전선(FN)의 장ㆍ마리ㆍ르펭당수가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르펭은 비유럽계 이민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이민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는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역사의 조그만 단면」이라고 말하는가 하면,카르팡트라스 사건 수일전에는 3백40만명의 프랑스회교도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르펭의 국민전선은 지난해 유럽의회선거에서 12%의 지지를 받았으며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오히려 지지율이 15%로 높아졌다.
최대야당인 공화연합측은 집권사회당이 야당을 견재하기 위해 은밀히 국민전선을 지원,오늘의 사태를 유발했다고 사회당과 국민전선을 싸잡아 공격했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전유럽이 화해와 통합으로 가는 이 시기에 갑자기 프랑스에서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대두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사실 프랑스에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70만명의 유태인이 살고있고 이들은 프랑스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정계지도자중 상당수가 유태인이며 유명한 재벌 로스ㆍ차일드가 역시 유태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식의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다만 인종차별의 대상이 그동안은 북아프리카 출신이나 아랍계 회교도여서 여론화가 되지못해 왔을 뿐이다.
프랑스의 한 인권운동가는 『프랑스인들이 그동안 무수히 있었던 회교도나 북아프리카인에 대한 차별ㆍ적대행위때 이번처럼 큰 관심을 보였다면 유태인묘지 훼손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운동가의 주장처럼 지난 3월만해도 한 알제리 청년이 석연치 않는 상황에서 경찰총격을 받아 숨지고 한 음식점에서 음식을 구걸하던 알제리인이 주방장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 등 북아프리카인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행동이 있었으나 여론은 이를 외면했었다.<배정근기자>배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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