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네티컷주 거주 듀마스씨/“정부 송환노력 포기” 단정 직접 생사 수소문/북도 「정성」 인정… “언제 돌아올까” 애절한 기대【뉴욕 지사=송혜란기자】 한반도에서도 냉전청산 작업이 본격화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고있다.
북한이 28일 판문점을 통해 5구의 한국전참전 실종미군(MIA)의 유해를 반환키로 한 사실은 동서간 「신데탕트」의 기운이 급기야 한반도에도 뻗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북한은 이번 유해반환에 이어 나머지 실종미군에 대한 유해발굴작업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북한이 미군유해를 파낸 자리에 「미제」에 대한 구원을 묻어버리겠다는 분명한 제스처다.
평양정권이 미군의 유해를 담은 관을 건네주는 대신 워싱턴으로부터 받을 선물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부풀리고 있는 요즘 그들의 대미 「미소 외교」에 들떠있는 미국인들이 있다.
미동부 코네티컷주에 거주하는 리처드ㆍ듀마스씨(59)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듀마스씨는 한국전 당시 신의주 부근에서 실종된 동생 로저ㆍ듀마스 상병(당시19세)의 생사여부를 수소문하느라 반평생을 보낸 또다른 6ㆍ25의 피해자.
듀마스씨는 북한의 이번 유해송환조치로 남다른 감회와 설렘에 젖어있다. 동생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보낸 40여년의 세월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기대때문이다.
듀마씨가 5구의 미군유해송환 소식을 처음 전해들은 것은 지난 11일. 유엔주재 북한부대사 허종이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 『우리 정부가 판문점에서 MIA 유해 5구를 송환키로 했다. 이 조치는 그간 이들을 포함한 MIA송환을 위해 애써온 당신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라고 알려왔다.
당시는 미국과 북한이 미군유해송환 사실을 공표하기 3일전으로 듀마스씨에 대한 북한측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듀마스씨와 유엔주재 북한외교관들이 이처럼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듀마스씨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한국전이 끝난 직후 북한과 중국으로부터 동생 로저ㆍ듀마스와 같은 수백명의 미군 전쟁포로(POW) 명단을 접수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들에 대한 송환노력을 포기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듀마스씨는 6ㆍ25당시 24사단 자동소총수였던 로저ㆍ듀마스가 50년 11월3일 고향에 마지막 편지를 보낸 뒤 소식이 끊겼으나 53년 5월까지 평양벽동에 있는 제5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달리 미 육군은 51년 11월 로저ㆍ듀마스를 실종군으로 분류한 뒤 54년에는 그를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서류를 꾸몄다는 것.
이같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듀마스씨는 79년 미 육군성을 상대로 동생의 신분을 「실종」에서 「포로」로 바꿔줄것을 청원했으나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에 불복,82년 미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전개한 끝에 승소했다.
듀마스씨는 이같은 과정을 겪으며 미국정부가 한국전참전 POW송환 실패를 은폐하려한다는 확신을 갖고 80년대 중반부터 뉴욕주재 북한외교관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동생은 어차피 소모품에 불과했지만 미국정부는 그가 언제,어디서,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히고 유해를 송환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듀마스씨는 5구의 미군유해가 반환되는 28일 판문점으로 달려가 북측인사들에게 동생의 유해도 함께 돌려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미국정부가 나의 판문점행을 허락치 않을 것』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도 북한에 8천5백여구의 실종미군및 포로의 유해가 남아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들 유해의 조속한 반환을 위한 미국과 북한정부의 성의를 새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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