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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국가상/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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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국가상/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0.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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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국내신문에 사회면 1단 기사로 보도가 됐다. 『동경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 이영근회장이 14일 상오 1시52분 동경 국립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비교적 자세하게 그의 경력을 보도한 신문이라야 겨우,그가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의 비서실장으로 농지개혁에 깊이 간여했으며,58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창간했고,조총련계 동포의 고국방문 사업을 처음 구상했음을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다.그러나 그 10행 남짓의 짧은 부보를 감회깊게 읽었을 독자가,젊은 편집자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특히 우리 현대사를 아프게 살아온 세대,그 현대사를 관심깊게 읽고,통일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 본 사람중에,오래도록 그를 기억할 사람이 적지않을 것도 틀림이 없다. 그만큼 그는 국내 식자들과의 교유폭이 넓었고,그가 겪은 우리 분단사의 아픔과 독보적인 통일론,통이 큰 처세등은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족했다. 그를 말하는 모든 사람이 이 점에서 일치한다.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런 전문에서 비롯이 됐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으므로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들은것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다만 기구하다면 기구한 그의 정치경력과 활동을 들을수록 그에 대한 관심이 더했고,글로써 발표된 그의 통일론을 읽은 감명이 지금껏 남아 있음을 말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의 경력이 관심을 돋구는 까닭중의 하나는 그의 정치적 입지와 정견의 남다름이다. 그는 여운형의 해방전 항일지하조직 건국동맹의 창설멤버중의 한 사람이었고,여운형이 이끌던 건준의 26세 청년 지도자였다. 굳이 색깔을 구분하자면 중도좌파,그보다는 왼편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해방뒤 정국에서 반탁편의 앞장을 섰고,단정에 대해서는 『오직 제주도 하나만으로도 주권국가를 세워 군정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처럼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그다운 민족주의가 그와 조봉암의 접점이다. 이 인연으로 해서 그는 잠시의 비서관 생활을 지내고,후에 진보당으로 결실이 되는 반이승만 신당운동에 참여,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구형 받기도 한다. 그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병보석 22개월만에 일본으로 탈출한다. 조봉암의 처형은 그이듬해 59년이다.

일본에 발을 붙인뒤 그의 활동은 통일이론의 정립과 그 실천으로 요약될 수가 있다. 망명 이듬해 통일일보 전신인 조선신문창간,4ㆍ19뒤 국내 민족일보창간 주도,민주조국통일회의 등의 조직활동,통일학원 등의 교육활동이 그 두드러진 것들이다.

이와 같은 그의 초기활동은 국내에서 보아 위화감을 줄만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의 통일론은 결국 북의 통일정책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비판하는데로 귀결이 되고,아주 정밀한 이론적인 틀과 실천의 명제를 갖추기에 이른다. 그 스스로의 말을 빌면 통일이론의 과학화란 것이다.

그의 통일론은 그가 발행해온 월간잡지 『통일』창간호(72년 3월)에 실린 그의 글 『통일의 개념정립과 통일후국가상의 법주』,같은 잡지 제2권 제1호(73년 1월) 이하에 연재한 『민주조국통일론』에 잘 집약이 되고 있다. 요컨대 그 줄거리는,통일이란 ①남북 분단장벽의 제거 ②통일정부 수립 ③민족동질성 회복에 이르는 것이며,이 과제는 ①남북의 통일지향 ②교류등 분위기 조성 ③통일실현의 단계를 거쳐야 풀수가 있다. 여기에는 온 겨레의 민주적ㆍ자주적인 참여­총선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연한 귀결로 4ㆍ19뒤 학생들이 폈던 「가자 북으로」의 통일운동,임수경양 방북,연방제통일안,북의 남북ㆍ미3자회담,우리 정부의 4자회담ㆍ6자회담론도 다 비판대상이 된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통일론에 대하여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그의 통일론이 보여준 통찰력과 선견성은 놀라운 것이 있다. 앞에 든 두 글이 72년의 남북 7ㆍ4성명을 전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도,7ㆍ4성명전에 쓴 글에 「통일후국가상」을 자세히 언급한 것이 돋보인다. 그가 그린 「통일후국가상」은 ①통일전행위에 대한 보복금지 ②독재배제 ③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국유ㆍ공유ㆍ사유의 병존 ④자주외교 ⑤민족동질성 회복때까지 연립정부 등이다. 이 역시 세부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으나,그의 주장이 남북간의 흡수통일을 부인하고,통일로의 접근 가능한 「국가상」을 제시한 것은 틀림이 없다. 6공의 7ㆍ7선언이 그같은 비전제시가 없는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혼란을 빚었고, 그 때문에 「무조건 통일」 「통일지상」의 기풍이 생겨 공안위기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이 글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맥락은 같은 것이지만,7ㆍ4성명 이듬해에 쓴 「민주조국 통일론」에 이미,성명이 밝힌 통일3원칙에 자주ㆍ평화ㆍ민족단결만 있고 민주통일의 원칙이 빠졌음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 역시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에 의하면 민주원칙을 뺀 3원칙만으로 하면,북의 남조선혁명도 가능하고,남북당국간 야합에 의한 통합도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일수는 없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의 이론적인 설명은 상당히 길지만,그보다는 서울에 까지 흘러 들어온 다음의 에피소드가 그 비판의 타당성을 더잘 입증해준다. 그것은 평양을 찾아간 이후락밀사가 통일3원칙을 수락했다는 보고를 들은 김일성이 「그사람 술 취한 것 아니야」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북의 대남총책 김중린이 제3국인에게 한말로 전해진다. 북이 7ㆍ4 3원칙을 성전모시듯 뇌는 까닭을 알만하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읽어보아도 그의 통일론은 매우 신선하다. 그의 통일론은 오늘의 남북상황에서 그 값을 더해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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