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은 아시아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였던 베트남의 국부 호지명의 탄생 1백주년이었다.베트남정부는 이날을 맞아 하노이에서 호의 기념관을 개관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와 문화축제를 개최하는 등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1890년 5월19일 중부 베트남의 구엔성 킴리엔이란 빈촌에서 프랑스저항운동가의 2남1녀중 2남으로 출생한 호는 사망한지 21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자나 반공주의자를 떠나 모든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다정한 「호아저씨」로서 정신적 우상이 되어왔다.
베트남국민들은 호가 지난 45년 수립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릴수 있었는데도 일평생을 변함없이 베트남을 프랑스 미국 등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자주독립통일국가로 키우기 위해 투쟁해온 것을 잊지않고 있다.
호는 대통령재임시 대통령궁의 사용을 꺼려 근처의 누옥에서 거거했으며,항상 농민복을 입고 턱에 염소수염을 기른채 서민들과 어울리길 즐겼다.
그는 대통령취임연설에서 골수공산주의자답지 않게 카를ㆍ마르크스나 레닌대신 토머스ㆍ제퍼슨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인용,국민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사실 호는 1920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베트남사상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됐다.
2년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4차 회의에 참석해 레닌 트로츠키등과 만났고,2년간 동양근로자대학에서 러시아어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이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3년간 중국각지를 돌면서 베트남혁명운동을 위해 베트남청년연맹을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보급활동을 하다 추방됐다.
호는 다시 태국으로 잠입,「조국해방해외베트남인연합회」를 조직해 지하운동을 벌이면서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주의운동세력을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통합시켰다.
31년 홍콩으로 간 그는 코민테른의 한 공작원의 밀고로 18개월간 투옥됐으나 탈출에 성공,모스크바로 도피했다.
38년 다시 중국남부로 들어간 그는 베트남출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하다 41년 고향을 떠난지 30년만에 다시 베트남땅을 밟게 됐다.
호는 당시 2차대전으로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자 베트남독립동맹인 「베트민」을 창설,항일운동을 하면서 프랑스군과 미군에 협력하기도 했다.
45년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웠으나 프랑스가 이를 인정치않고 괴뢰정권을 내세우자 베트민을 이끌면서 프랑스와 게릴라전을 전개,마침내 54년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제네바평화협정에서 베트남이 세계강대국들에 의해 둘로 갈라지게 되자 북쪽인 월맹을 이끌면서 미국이 지원한 월남과 다시 끝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월맹은 69년 9월2일 그가 사망한지 6년후인 75년 4월30일 월남을 적화하고 전베트남을 통일하는데 성공했으며,사이공시를 호지명시로 개명했다.
이처럼 호는 세계강대국인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한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으며 자신의 이념인 공산주의를 이식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꼭 공산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다.
그는 오랜 해외생활로 서구문명사회를 일찍부터 깨달았으며 불교 유교 가톨릭의 사상에도 심취했었다.
그는 평소 『국가가 독립했어도 국민들이 행복이나 자유를 누릴수 없다면 그 독립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 왔다.
외교적으로도 중소관계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런 그의 노선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으나 구엔ㆍ반ㆍ린 서기장 등 베트남공산당의 현지도부는 기회있을 때마다 당간부들의 부패와 권력남용 등을 비판하면서 호의 정신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호의 외교정책을 추구했으면 70년 중월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백50달러미만인 베트남은 최근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조심스럽게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당의 개혁파들은 호가 사망당시 유언으로 남긴 『1년간 모든 농지세를 감면 하라』는 뜻을 무려 21년이나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올해부터 향후 2년간 50%씩 감면하겠다는 시책이 그것이다.
호가 주장했던 실용주의는 20여년이나 후퇴를 한끝에 뒤늦게 빛을 보게된 셈이다.
베트남은 최근 소련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수정,「과거의 적」이었던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등 서방국가와 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서방의 일부 전문가들은 베트남의 이런 개혁ㆍ개방정책을 지난해 동구권 공산주의국가들의 잇단 붕괴의 여파로 분석하면서 베트남이 동구와는 달리 중국식의 개혁노선을 취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은 그러나 베트남의 개혁정책은 결국 실패할 것이며,「호의 생일선물」은 바로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가들은 호가 결코 중국의 모택동이나 북한의 김일성과는 다르며 그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 베트남인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강조한다.【이장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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