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ㆍ사회단체 만들어 법망피해/검ㆍ경찰ㆍ의원등 사귀며 유명인행세도지난해 1월 폐암선고를 받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던 조직폭력계의 대부 김태촌씨(42)가 석방 1년4개월만에 또 다시 폭력조직결성및 배후조종혐의로 검찰에 검거됐다.
검찰은 조직폭력배를 뿌리뽑아야한다는 여론이일자 지난 1월 민생침해사범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한이래 석방후 행적이 수상한 김씨의 행적을 면밀히 내사,드디어 범행의 꼬리를 잡아낸 것.
검찰은 김씨가 폭력및 공갈ㆍ협박등 10여건을 배후조종ㆍ지시한것으로 파악했으나 피해자들이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좀처럼 입을 열지않아 범죄구증에 애를 먹었다.
또 김씨가 「사형선고」를 받은 몸으로 기독교에 귀의,S교회의 독실한 신자로서 신앙간증활동을 펴고 신우회라는 사회사업단체를 결성,각종 불우이웃돕기운동에 나서는등 「양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더욱 수사가 어려웠다는 것.
순수히 법률적으로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재소자가 수형생활을 견딜만큼 건강이 회복되거나 또는 우범자들과 어울리는등 범죄의 우려성만 있어도 형집행정지처분을 취소,별도의 재판절차없이 다시 교도소에 수감시킬수있지만 김씨는 석방이후 교묘히 합법을 가장하고다니며 수사기관의 눈을 피해왔다.
검찰은 김씨가 석방이후 외부로 드러난 활발한 전도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폭력세계와 손을 끊기는 커녕 양은파두목 조양은씨가 복역중이고 OB파두목 이동재씨가 해외로 도피한데다 전호국청년연합회총재 이승완씨의 구속으로 힘의 공백상태가 생기자 번개파두목 박모씨와 함께만든 신우회로 「천하통일」을 하려한 것으로 보고있다.
검거당시 무려 2억1천만원이란 거금을 몸에 지니고 있던 김씨는 서울 이태원일대와 광주ㆍ인천ㆍ제주의 호텔및 오락실등을 장악하는데 성공,항상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니는등 마치 일본 야쿠자보스의 흉내를내며 세를 과시하고 다녔다는 것. 김씨는 석방두달뒤인 지난해 3월 박모씨등 과거폭력조직계보스급 20여명과 신우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자신은 감사로서 실질적인 대부노릇을 해온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또 지난해 6월 경기 파주에 있는 S교회소속 금식기도원옆 야산에서 과거동료및 후배 5백여명을 모아놓고 기도대축복성회를 열었는데 검찰은 이 대회가 김태촌계의 세력단합대회로 보고 이때부터 신경을 곤두세워 왔다.
검찰은 김씨 아래에는 17개의 하부조직이 있고 직계조직으로는 맘보파의 오모씨를 비롯,손모ㆍ윤모씨등 중간보스들이 있고 주근거지는 강남일대로 보고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에 나섰다.
검찰은 김씨가 주도하는 신우회의 회원이 1천여명에 달하고 주로 재소자선도,불우이웃돕기,심장병어린이돕기등을 활동목표로 내걸고 파주의 기도원을 임시사무실로해 매월 1회씩 회합을 가져왔으나 이것도 김씨의 조직활동과 관련이 있는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김씨는 석방이후 종교와 권력의 보호막이 필요하다는것을 절감,S교회의 독실한신자로 행세,조모목사와 친분을 두터이하는 한편 과거에 알던 검사ㆍ경찰ㆍ국회의원ㆍ사업가들과도 부지런히 접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86년9월 인천뉴송도호텔 사장피습사건으로 구속돼 징역5년 보호감호10년을 선고받고 청송교도소에 복역중,폐암진단을 받고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왼쪽폐의 일부를 잘라내고 복역 2년3개월만에 석방된 김씨는 입원중에도 호화생활을 하여 구설수에도 올랐다. 방2개짜리 특실에 건장한 부하 5∼6명이 항상 호위하는가하면 일본에서까지 문병올 정도로 항상 병실이 붐벼 이바람에 병원주차장에는 이들이 타고 온 고급승용차가 즐비했다는 것.
스스로 2년시한부 인생이라고 말해온 김씨는 수술후 주로 파주기도원에 거처를 정하고 3∼4차례 입원생활을 했는데 주변에서는 자신에 대한 검거정보가 있을때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간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석방이후 친지출영이나 지방여행을 위해 3∼4차례 김포공항에 나타났을때 공항경찰이 수속을 해주는등 극진한 대우를 받기도해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검찰은 이때문에 김씨가 구속후 15년(징역5년ㆍ보호감호10년)이란 수형생활을 면키위해 의사들을 협박,허위진단을 받아내 멀쩡한 폐를 잘라냈을 가능성도 있을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광주태생인 김씨는 광주의 변두리 서방지역에서 7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서방파를 결성,75년 호남의 폭력조직을 규합,서울로 원정와서 서울의 지배세력인 신상사파를 누르고 일약 폭력계에서 「최고의 칼잡이」로 통하게 됐다.
이후 김씨는 76년3월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최대의 라이벌인 광주OB파와의 혈투에서 승리,서울과 광주를 동시에 장악함으로써 폭력계의 천하통일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76년도 신민당전당대회에 각목을 들고 난입 수리장을 만들었던 김씨는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다 지난 80년 사회악일제소탕때 검거돼 수감됨으로써 조직이 와해되는듯 했다.
그러나 85년 출감한 김씨는 오모씨가 이끌던 맘보파를 흡수,정치계ㆍ연예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86년6월 한강고수부지에서 과거의 주먹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새마을축구대회를 여는등 또다시 폭력계를 천하통일하려다 같은해 9월 인천뉴송도호텔 사장피습사건으로 구속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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