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범석방”고에 편지… “돌아오라”전화/모스크바역에 보도진 북적… 석달동안 인터뷰세례/“「고」는 지적인지도자”소신에 일부 망명인사 “배신감”/“인간적 가치보존”마지막 기원86년 2월 나는 고르바초프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가 프랑스공산당 기관지와의 회견에서 『소련에는 정치범이 없다. 자신의 신념을 표명한 이유로 처벌받는 소련시민은 없다』고 말한것에 대해 나는 실제로 종교적믿음등의 신념에 대해 다양한 죄목의 처벌이 자행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 정치적이유로 정신병원에 수용되거나 날조된 죄목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뒤 모든 양심범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했다.
8개월뒤인 그해 10월초 연방검찰차장 안드레예프가 지방검찰청으로 나를 불렀다. 안드레예프는 내가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서신에서 열거한 수감인사들은 모두 적법한 처벌을 받은 것이라고 해명,나를 실망시켰다.
10월23일 나는 재차 고르바초프서기장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나는 법을 어기거나 국가기밀을 누설한 일이 없는데도 재판절차조차 없이 불법적으로 유배돼 아내와 함께 유례없는 유폐상태에 있음을 강조했다.
또 언론이 아내를 비방하는 것은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려는 의도임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건강문제를 언급하고,때문에 「침묵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개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의 유배생활을 종식시키는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첫편지를 보낸지 약 두달뒤인 12월9일 아내 루시아가 잡음이 몹시 나는 라디오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중 작가 아나톨리ㆍ마르첸코의 이름이 얼핏 들렸다. 그는 내가 편지에서 첫번째로 언급한 투옥인사였다. 우린 처음 그가 석방됐다는 소식으로 생각했다. 그는 8월4일부터 치스토폴감옥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뉴스는 마르첸코가 전날 저녁 병원으로 이송됐다가 뇌출혈로 숨졌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2월15일은 부친의 기일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지난시각에 아파트 현관벨이 울렸다. 『가택수색인가?』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KGB요원이 2명의 전공과 함께 들어와 전화를 설치했다. KGB요원이 『내일아침 10시쯤 전화가 올겁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하오 3시께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 여자가 『미하일ㆍ세르게이비치의 전화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고르바초프야』라고 말했다. 아내는 현관문을 열고 언제나 처럼 복도에서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던 경찰관들에게 『조용히해요! 고르바초프에게서 온 전화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내 조용해졌다.
고르바초프는 『당신 편지를 받고 검토ㆍ논의했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와도 좋습니다. 최고회의간부회의 결정은 취소될 것입니다. 「엘레나ㆍ본내르」에 대해서도 같은결정이 내려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중간에 말을 막고 『그녀는 내 아내요!』라고 말했다. 그가 아내의 이름(본너)을 잘못 발음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무적 말투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계속해서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됩니다. 아파트가 마련돼 있습니다. 애국적과업에 복귀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고맙소. 하지만 며칠전 내친구 마르첸코가 감옥에서 죽은 사실을 말해야겠소. 편지 첫머리에 썼던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석방하거나,수감상태를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거론한 수감자중에는 여려종류의 인물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런 죄목으로 수감된 모두가 불법적으로 처벌된거요. 석방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는 『동의할 수 없소』라고 말했으나,나는 계속해서 『이 문제는 우리 조국과 국제적 신뢰,평화,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개혁계획을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르바초프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나는 의전을 무시한채 먼저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뒤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긴장과 함께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낀 탓이었을 것이다.
12월23일 우리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야로슬라블역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군중을 헤치고 나오는 데 40분이 걸렸다.
수백개의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질문공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후 몇개월동안 계속된 인터뷰에 매달려야 했다.
인터뷰때마다 받는 질문중 하나는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나의 견해였다. 85년 세마슈코병원에 수용돼 있던 나는 고르바초프에 대해 『지적인 지도자를 갖게 된 것은 국가의 행운』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초창기 그에 대해 가졌던 긍정적사고는 아직 변함이 없다. 그도 흐루시초프처럼 당관료주의의 한계를 초월하는 특출한 개성을 지녔다.
고르바초프는 연설에서 종종 관료체제의 저항에 대해 말하는데 이말은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처럼 들린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진로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는 민주개혁에 의지하기 보다는 개인적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반페레스트로이카세력과 타협하고 있다.
그가 국가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글라스노스트 ▲새로운 인사정책 ▲군축을 위한 새로운 대외정책 ▲민주화등을 추진해야 한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나의 소신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소련내의 반체제인사들과 서방망명소련인들중 일부는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는듯 하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한 러시아어신문은 언젠가 『사면받은 노예가 주인을 돕고 있다』는 제목의 비난기사를 쓴 일도 있었다.
지난 87년 2월 미국제관계협의회대표단을 만난 나는 소련이 개방된 민주사회가 되는 것이 서방의 이익에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헨리ㆍ키신저는 『소련이 그런 다음 훨씬 강력한 확장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폐쇄된 사회의 일방적인 군비확장이 문제이지 개방되고 안정된 소련의 평화적 경제체제가 위협이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지난 74년 나는 「50년후의 세계」라는 미래학적 글에서 『인류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모든 위난을 종식시키고 우리를 인간답게 하고 있는 모든가치를 보존한채 진전되길 바란다』고 결론을 지었었다. 이 회고록 역시 이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주:89년 12월14일 공산당에 대항할 새로운 정당창설 문제로 동료들과 함께 열띤 논의를 하고 돌아온 사하로프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그대로 영면했다. 68세의 생애를 통틀어 그가 「자유인」으로 보낸기간은 3년이 채 못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