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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정치/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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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정치/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0.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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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치를 외교하듯 한다. 청와대회동이니,영수회담이니 하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어렵게 만나고,격식과 절차를 따지고,숨어서 협상하고,끝나면 합의문서를 작성하고 공동발표문을 낸다. 그러나 남는것은 별로 없다. 그 모양은 마치 한때의 동서 정상회담,난제를 안은 외교무대의 원탁회의 같다. 어쩌다 우리끼리의 정치가 남남끼리의 절충,그것도 냉전외교의 모양새를 닮은 것이다.이같은 영수회담의 효시는 65년 7월20일 6ㆍ3사태 수습을 위해 열린 박정희대통령과 박순천여사(민중당대표)의 청와대회담일 것이다. 계엄령아래 어려운 절충끝에 열린 이 회담은 한ㆍ일 협정비준안과 월남파병동의안 등을 포함한 5개 합의사항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신문은 이를 호외로 보도하여 반겼다. 그러나 정작의 정국은 경색을 거듭했고 박여사는 밀약의 오해속에 정치적 운신의 폭을 잃었다.

이 뒤의 청와대회동은 유신을 전후한 70년 8월과 73년 6월의 박정희=유진산(신민당당수),75년 5월 박정희=김영삼(신민당총재)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때도 유당수나 김총재는 밀약설에 시달렸다. 5공 들어서는 회동이 더 잦아져서 정례화하다 시피했고,6공은 여소야대 정국운영을 청와대회동에 의존했다. 3당통합 뒤 요즘와서는 거여의당내 문제마저 1노 2김의 청와대회동으로 푼다. 당의 운영마저 외교하듯 하기에 이른 꼴인데,여기에도 밀약설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정치의 한 전통이라면 전통이다. 굳어버린 이되풀이에 공통된 것은 ①극한에 이른 정국경색=정치위기 ②영수회담을 통한 타협모색 ③소강 ④실망 ⑤정국경색의 악순환이다. 5∼6공들어 청와대회동이 정례화ㆍ정식화했다는 것은,정국운영이 유연해졌다기보다는,오히려 그런 위기상황이 항재화한 탓이라고 볼 수가 있다. 영수회담이 「대타협」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정치위기를 미리 막을 정치게임의 규칙을 정립하는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이런것이 외교를 닮은 정치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총제적 난국」을 풀기위해 노­김의 여ㆍ야 영수회담을 다시 추진한다는 소식이 그리 탐탁하게 들리지 않는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은 작년말 정기국회 폐회를 앞두고 있었던 1노 3김 「대타협」외 11개항 합의문을 읽어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돌이켜보아 그중 실현된 것이 몇이나 되는가.

그중가장 뚜렷한 예가 지자제다. 지자제는 6ㆍ29선언 제6항에 들어 있다. 이에 따라 88년 4월 지자법이 개정ㆍ공포됐다. 새법은 우선 시ㆍ군ㆍ구의회는 이듬해 4월말까지,시ㆍ도의회는 이뒤 2년안에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야대국회는 89년말까지 시ㆍ도의 장과 의원,90년말까지 시ㆍ군ㆍ구의 장과 의원을 선거하도록 법을 다시 고쳤고,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지자제가 작년 세밑 「대타협」의 대상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대타협」에 따라 3번째 고친 지자법 부칙이 정한 일정은 각급 지방의원선거를 오는 6월말까지,자치단체장의 선거는 내년 6월말까지로 못박고 있다. 그러나 지금와서 여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연내 지자제시행」이란 말을 생색내듯 하고 있다. 야당의 김대중총재는 연내의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자치단체장의 동시 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대타협」의 산물인 지자법 부칙쯤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장황한 경위,명멸을 거듭한 그 많은 시한의 불빛들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수회담의 체통을 건 「대타협」의 다짐도 별것이 아니더라는 것뿐이다. 이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합의를 문서화해서 공표해 봐야,그 내용을 법의 명문으로 규정해 봐야,그대로 되는 것이 없더라는 얘기가 된다. 더구나 이처럼 딱한 꼴이 지자제 하나에 그치지를 않는다. 지난번 「대타협」 합의문에서만 골라 보아도,보안법 안기부법 경찰관계법 광주문제입법 등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이미 처리했어야 할 안건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다음 정기국회에서 타결이 되리란 전망도 별로 뚜렷치가 못하다. 이런 형편을 올들어서의 상황변화­3당통합의 정계개편 탓으로 돌리면 그만인 것일까. 이러다가 우리 정치에 시한의 불빛이 깜빡일 때가 닥치지 않는다고 누구가 장담할 것인가.

요즘 말하는 「총체적 난국」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위기라면 그것은 경제의 위기라기 보다는 정치의 위기요,약속위반ㆍ합의위반이 빚은 신뢰성의 위기라는 것이다. 위기탈출의 처방도 여기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우리 정치모양을 냉전외교같다고 했지만,그사이 영수정치는 예전의 군주외교를 닮은데가 없지도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지 상기할 것은 없지만,민주적인 공론을 수렴하지 않고 사안을 독단하는 것이나,합의이행이 투명치못했던 것 등이 모두 그런 낌새를 풍긴다.

이제 그런 군주외교 같은 영수정치는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 비상한 「대타협」보다는,여ㆍ야가 제각기 당내의 의견을 수렴하고,일상의 통로를 통하여 대화를 하며,국회에서 토론을 하는 「작은 타협」의 집적이 정치의 정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의 활성화가 이것이요,굳이 비유하면 민주적인 공개외교나 같은 것이다. 이때 영수가 할 일은 그의 권위로써 타협의 큰 방향을 잡고 합의가 실행이 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것을 영수회담에 기대하는 정치를 정치답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이 다음 열리는 청와대영수회담은,합의를 지킨다는 합의를 먼저 이끌어 내야 하리란 것이다. 합의를 하고 합의를 지키는것 말고,지금의 정치위기를 탈출할 방법이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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