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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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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5

입력
199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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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활동 계속… 끝내 유배지로/가족들 수난… 딸은 대학서 제적/노벨평화상수상… “국가기밀 누설된다”출국못해/지지학자들 잇단해임,“반소행위”비난 캠페인도루시아(엘레나ㆍ본너)와 재혼한 이후 당국은 그녀의 아이들을 나의 공적활동을 견제하는 인질로 삼았다. 직장과 학업에 제약을 가하거나 체포ㆍ수감위협을 자행했다. 심지어 살해위협마저 느껴야했다.

딸 타니야는 72년 뮌헨올림픽선수촌에서의 이스라엘선수단 학살사건후 모스크바주재 레바논대사관 앞에서의 침묵시위에 나와 함께 참가했다가 모스크바대학에서 쫓겨났다. 아내 루시아는 73년 10월 반체제 천문학자 루바르스키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려다가 폭력으로 저지하는 KGB요원 지휘자의 뺨을 때렸었다.

2주일후 루시아는 모스크바시당위원회에 소환돼 출당위협을 받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당원증을 책상위에 꺼내놓고 『기다려왔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이일이 있은지 얼마뒤 루시아의 아들 알렉세이가 모스크바대학에 지원했으나 입학이 거부됐다. 알렉세이는 고등학교를 수석졸업했고,수학경연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수재였다. 후일 우리는 대학당국이 입학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73년 8월 연방검찰 차장 말리야로프가 전화로 만나자는 요구를 해왔다. 푸슈킨가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내가 외국언론들과 회견을 갖고 있는것은 국가기밀준수의무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굴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1주일뒤 내 아파트에 30여명의 서방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회견에서 나는 소련체제를 폐쇄적 전제사회라고 비판하면서 서방세계는 소련의 군사적 우위확보를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나의 회견이 서방언론에 보도된 1주일뒤 40여명의 소련학자들이 연명으로 나의 「소련과학의 명예를 훼손시킨 행위」를 비난한 서한이 신문에 일제히 게재됐다. 이어 과학연구소와 작가ㆍ예술가 동맹,재향군인,광부ㆍ농부 등의 이름으로 나를 비판하는 캠페인이 잇달았다. 반면 응용수학연구소의 발렌틴ㆍ투르친은 나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이 때문에 공개비판을 받고 강등됐다가 결국 해임당했다. 그는 개인교수로 연명하다가 결국 77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물리학자 유리ㆍ오를로프도 나를 옹호하며 정치ㆍ경제개혁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브레즈네프에게 보냈다가 해직당했다.

75년 10월9일 내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당시 아내는 당국과의 오랜 실강이 끝에 출국허가를 받아 이탈리아에서 녹내장치료를 받고 있었다. 당국은 노벨상수상소식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국가기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란 이유로 노벨상수상식 참석을 위한 노르웨이 여행허가를 거부당했다. 이 때문에 아내 루시아가 대신 수상했다.

(주:70년대말까지 사하로프는 소련당국과의 투쟁을 게속할 수 있었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국제적명망과 그의 체포가 가져올 대외관계악화를 소련당국이 고려해야했기 때문이었다)

80년에 접어들면서 KGB의 권한과 활동이 대폭 강화돼 검거 선풍이 몰아쳤다. 79년 시작된 아프간침공과 다가온 모스크바올림픽 때문이었다.

그해 1월17일 미 ABC방송기자들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왔었다. 회견이 끝난뒤 이들을 배웅하러 밖으로 나온 나는 KGB요원들이 주위에 깔려있는데에 놀랐다 어딘지 적대적인 태도가 느껴졌다.

『어,이친구들이 와 있군』이라고 말하자 KGB요원중 한명이 『예,여기 있습니다!』라고 조롱하는투로 되받았다. 이때 이미 이들은 나에 대한 유배결정을 알고 있었던듯 했다.

1월22일 한 친구가 몹시 흥분한 어조로 전화를 걸어 나에 대해 모든 명예박탈과 유배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날 나는 당시 일하던 물리학연구소의 세미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연구소배차실에 차를 부탁해 하오 1시30분 집을 떠났다. 크라스노코름스키다리에 이르렀을때 교통순찰차가 내가 탄 차를 세우더니 2명의 요원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들은 앞좌석의 나에게 붉은색의 내무부소속 증명서를 내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KGB요원이었다.

이들은 운전사에게 푸슈킨가의 검찰청으로 차를 몰도록 지시했다. KGB요원들은 나를 검찰청 4층의 검찰차장 레쿤코프의 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레쿤코프에게 『왜 소환장을 보내지 않고 납치를 했는냐』고 물었다. 레쿤코프는 『긴급한 상황이라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최고회의 간부회의결정사항을 통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결정문을 읽었다.

『국가 훈장수훈자로서의 자격을 훼손한 사하로프의 조직적 행동과,소련국민의 여론에 따라 최고회의간부회의는 사하로프의 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등 모든 국가포상을 박탈한다. 사하로프를 외국인과 접촉할 수 없는 장소로 유배키로 결정했다』

레쿤코프는 이어 『유배지는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고리키시로 결정됐다』며 통고를 받았다는 서명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또 『법률에 따라 자격박탈된 훈장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그 훈장들은 나의 공헌을 인정해준 것이므로 반납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레쿤코프는 『즉시 고리키시로 출발해야 한다』며 『부인과 동반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뒤 커튼으로 창문을 모두 가린 미니버스를 타고 도모데도보공항으로 갔다. 경찰차 2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앞뒤에서 호송했다. 아내는 두시간뒤 공항에 뒤따라 왔다.

내 전화를 받은 직후 전화통화가 단절됐으며,경찰과 KGB요원들이 아파트를 둘러싸고 친구들과 외국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알려주었다. 아내가 도착한 5분뒤 우리는 KGB요원 6명과 함께 TU 54기에 올랐다. 우리는 함께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앞날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지구의 끝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고리키시에 도착하자 다시 미니버스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느냐?』고 아내가 감시원에게 묻자 그는 『집이요』라고 비웃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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