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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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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4

입력
1990.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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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0년대들어 사하로프박사와 소련정권간의 갈등은 계속 심화된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억압정책이 가중되면서 사하로프는 국내외의 반체제 인권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66년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푸슈킨 광장에서의 침묵시위에 참여했으며,67년에는 수감된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는 서한을 브레즈네프 서기장에게 보낸다. 이때문에 그는 당국으로부터 50% 감봉처분과 함께 모스크바 동쪽의 「핵도시」에 있는 연구소 직책에서도 강등 당한다】◎「반체제 책」저술… 전세계서 출간/「프라하의 봄」발생… 희망에 들떠/연구소서 해임 “당신은 비판할 도덕적 권한 없다”/격려하던 아내 암으로 숨져… 인권운동가와 재혼

68년에 이르러 나는 우리시대의 기본적 문제들을 공개,지적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한층 절박하게 느꼈다. 이같은 개인적 책임의식은 수소폭탄개발에 참여했고,핵전쟁에 관해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고,소련체제를 잘 알고 있기에 한층 강했다. 나는 개방사회,자본주의와 공산주의체제의 수렴,그리고 세계정부와 같은 개념들이 우리시대의 비극적 위기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해에 나는 결단을 내려 「진보,평화공존 및 지적자유에 관해」를 출간했다.

이 책의 출간은 우연히 「프라하의 봄」 사태와 같은 시기에 이뤄졌다. 사회주의 국가의 수많은 인민들이 오랫동안 희구해오던 것들이 드디어 체코에서 실현되는 듯 했다.

표현의 자유와 검열철폐 등의 민주주의,사회경제체제 개혁,비밀경찰에 대한 통제,그리고 스탈린시대(체코의 경우 고트발트시대)의 죄악상의 공개등이 우리가 기대한 것들이었다. 멀리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들도 「프라하의 봄」,「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등의 구호가 상징하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도 축소판 「프라하의 봄」 캠페인이 벌어졌다. 알렉산더ㆍ긴즈버그 등 그해 1월에 재판에 회부된 반체제인사들을 위한 서명운동에는 소련에서는 유례없는 숫자인 1천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태는 KGB를 놀라게해 강경대응조치가 뒤따랐다. 공개비판 해직 출당조치 등이 대대적으로 취해졌다. 이후 사람들은 이같은 인권캠페인에 이름을 빌려주기를 거절하게 됐다.

부끄럽지만,나는 이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대신 나는 68년1월말께부터 한 친구의 제안으로 오늘날과 같은 세계에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저녁 7시부터 자정께까지 연구소의 방에서 이글을 썼다. 아내 크라바는 이에 따른 위험을 걱정하면서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글을 통해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핵전쟁의 결과와 환경파괴ㆍ기아ㆍ인구폭발ㆍ소외 및 사상의 왜곡 등에 관한 경각심을 환기하고자 했다.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의 상호수렴,즉 화해가 그같은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ㆍ사회ㆍ사상적 수렴을 통해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다원적사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대문이었다. 또한 스탈린주의의 죄악의 완전한 공개와 의사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소 유토피아적인 인류의 미래를 위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해 4월1일 나는 완성된 원고를 갖고 모스크바로 가서 역사학자 로이ㆍ메드베데프에게 보여주었다. 메드베데프는 이 원고를 몇몇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논평을 얻어 주었다. 나는 원고를 다소 수정해 다시 메드베데프에게 주었다. 메드베데프는 10여권의 복사판을 만들 예정이었는데 이중 일부가 해외로 유출될지 모른다는 점을 미리 환기시켜 주었다.

나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도청을 피하기 위해 필담을 나눠야했다.

5월18일 나는 연구소장 유리ㆍ카리톤을 찾아가 『전쟁과 평화,환경문제 및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글을 써 사미즈 다트(지하출판조직)에 넘겼다』고 말했다. 카리톤은 『맙소사. 제발 고만두게』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6월초 카리톤과 함께 그의 전용열차로 연구소가 있는 「핵도시」로 가는 도중 카리톤은 『KGB의장 유리ㆍ안드로프가 당신의 저서가 소련전역에 유포되고 있다고 알려왔다. 해외로 유출될 경우 크게 다칠테니 스스로 회수할 것을 당부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카리톤에게 문제의 책을 직접 읽어보라고 전했다. 책을 받아든 카리톤은 곧장 자신의 객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소감을 묻자 카리톤은 『무서운 내용』이라고 논평했다.

6월중순께 반체제작가 아말리크가 나의 저서를 네델란드 기자에게 넘겨주었고 7월10일 나는 BBC와 VOA방송을 통해 네덜란드 신문이 나의 글을 게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더없이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모스크바로 가지 직전 연구소장 카리톤을 찾아가 이 사실을 전했다. 그는 『그럴줄 알고 있었다』고 절망한 기색이었다.

두시간뒤 나는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후 나는 다시 나의 연구실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7월말께 기계공업부장관 슬라프스키가 나를 호출했다. 『전국의 당간부들이 전화로 반혁명선전행위를 중단시키는 강경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수렴론을 「환상」이라고 공박하면서 『당신은 우리세대(스탈린시대)를 비판할 도덕적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몇주뒤 카리톤연구소장은 내게 『모스크바에 당분간 있으라』고 사실상 해임을 통고해 왔다.

나의 저서는 7월22일 뉴욕 타임스에 게재됐고,곧 세계각지에서 출간됐다. 69년까지 1년사이에 1천8백만부가 출판돼 모택동과 레닌에 이어 역대 3위의 베스트셀러 저자가 됐다고 한다.

이 책은 소련에서 지하루트를 통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불법배포 혐의로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다.

예를 들어 두샴베에 사는 한 택시운전사는 이 책을 친구에게 우송해 주었다가 「체제비방」협의로 3년간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해 8월21일 바르샤바조약군은 체코를 침공했고 「프라하의 봄」은 끝났다.

69년 병약한 아내 크라바가 장암으로 숨졌다. 71년8월부터 나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태인으로 맹렬한 여성 인권운동가인 엘레나ㆍ본너와 함께 활동하면서 가까워졌다. 72년1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에는 검은양복차림의 KGB요원 6명이 참석했다. 내 결혼상대에 반대하고 있음을 시위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나와 아내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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