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확정에 느긋… 「생색사과」돌변/노대통령 “진실된 사과”촉구직후 곧 반박식 주목/국회,국수여론 조성… 정부호응/「일왕옹호」 계산된 구태 되풀이노태우대통령 방일때 일왕의 과거역사에 대한 사죄표명의 수준을 놓고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던 일본측이 급기야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망언을 서슴지 않기에 이르렀다.
일본 자민당의 한 고위간부는 14일 저녁 일왕의 사과문제에 대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는 극언으로 한국민의 감정을 정면으로 자극하고 나섰다. 이 간부의 망언이 있기 직전 자민당은 당4역 회의를 열고 『아키히토(명인)국왕이 한국국민에게 할 발언은 84년 히로히토(유인) 국왕이 표명한 「유감」이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당론을 확정,이를 일본정부에 전달해 쐐기를 박았었다.
자민당의 당론확정이나 간부의 망언은 노대통령이 이날 서울에서 일본 특파원단과 가진 기자회견내용이 일본에 전해진 직후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노대통령은 이 회견에서 『과거의 역사에 대해 가해자가 잘못됐다고 사죄하는 것은 당연하며,가해자가 사죄인지 아닌지 모르게 애매하게 얘기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진심을 의심하게되는 법』이라고 일본측의 명확하고도 진실된 사과를 희망했다. 따라서 일본측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같은 희망에 대한 정면 거부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대통령 방일이 한일양국에서 동시에 발표된 후의 언행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대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데,아니 오히려 더 덧나가는판에 피해국 대통령의 방문을 성사시키고,자기네 국왕이 답례방문만 하면 「새시대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망발에 가까운 발언을 해도 되는 것인가.
사실 이번의 대한사죄 문제를 둘러싼 일본측의 얄팍한 대응태도는 지난번 재일동포 법적지위협상때와 신통하게도 닮은데가 있다. 수상과 외무성관계자가 서로 다른 소리를 하고,행정부와 집권당이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며 진정한 태도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게 했다. 언론에 흘려 반대분위기를 유도하고 국회에서는 여당의원과 수상이 미리 짠듯한 질문 답변을 주고 받았던 것을 우리 국민은 똑똑히 기억한다.
일본측의 과거사죄문제에 대한 태도가 처음 알려진것은 지난 8일 요미우리(독매)신문에 보도된 정부관계자의 발언을 통해서였다.
재일한국인 3세 법적지위문제가 한일외무장관 회담에서 미봉책으로나마 가까스로 타결을 본 며칠후이다.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조간판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과거에 대한 유감표명이 구체적일 것이며,히로히토 전왕보다 더 진전된 언급을 할 것이라고 정부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때부터 일극우보수세력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듯 바로 그날 하오 와타나베 일외무성대변인은 일왕의 대한사과문제에 확정된 내용은 없다고 부인했다.
다음날인 9일 국회에서 자민당의 노다(야전)의원은 수상에게 『왕실을 외교문제에 개입시키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 정부측과 조율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에 가이후(해부)수상은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생각한다. 왕의 말씀보다는 총리가 일본국민을 대표해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일본특유의 「천황옹호론」이 드디어 고개를 쳐든 것이다. 이때 가이후총리는 한일수뇌회담석상에서 『극히 겸허한 자세로 과거의 경위를 반성할 생각이며,스스로 책임을 지고 솔직한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던 그가 이틀뒤엔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등 아시아전체에 사죄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일본이 과거 전쟁역사의 책임을 폭넓게 사죄하겠다는 태도같지만 달리 보면 한국대통령을 만난자리에서 한국에만 국한한 사죄는 하지 않겠다는 「물타기」의도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일본측이 아키히토일왕의 사과를 구체적 표현없이 히로히토전왕의 발언을 모양만 바꾸는 선으로 매듭지으려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이렇다. 일왕은 국가의 상징일뿐 정부의 최고책임자가 아니므로 그발언에 헌법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국가원수의 발언에 구체성을 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뒤집어 말하면 일왕이 솔직하고도 명확하게 사과할 경우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리이다.
식민지 지배의 당사자인 히로히토전왕과 현 아키히토왕의 입장이 같을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면 히로히토전왕은 명확한 사죄를 했던가. 우리가 요구하는 「사과」는 외교적으로 「후회」에 버금가는 강도높은 표현이나 84년 전두환전대통령 방일때 히로히토전왕이 한 「유감」은 이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누가누구에게 잘못했기에 유감이란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내용이었다.
사과문제에 관한한 「일본의 상징인 일왕이 과거 식민통치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직접 명백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게 한국민의 솔직한 감정이다.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면서 끼친 해악은 어떠한 사죄로도 부족한 엄청난 것이었다는 역사인식과 반성이 없기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는 망언이 터져 나온다고 한국인들은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식의 사죄는 원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난 사죄가 아니라면 「엎드려 절받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정부도 차제에 『법적지위개선문제에서도 큰 성과가 없고 흡족한 수준의 사과도 얻어내지 못하는 판에 대통령이 왜 꼭 일본에 가야하느냐』는 소리들에 귀 기울여야한다.
두나라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선린우호관계로 발전시키려는 뜻은 높이 사지만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안 가는 것이 낫다는 소리가 더 큰 것 같다.【최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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