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싸고 흐루시초프와 충돌/“무익”에 “정치관여” 비난/“미실체보라” 대미회담 동행약속/노력끝 「대기권 핵실험금지」성사핵실험이 거듭될수록 환경오염에 관한 나의 우려는 날로 커졌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결국 흐루시초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를 경험했다.
내가 흐루시초프를 처음 만난 것은 59년 크렘린에서 열린 군사기술에 관한 한 군사회의석상이었다.
흐루시초프는 회의개막연설에서 군사비 감축과 효율적인 국방계획수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난 그는 그후 일관된 개혁의지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관료조직으로부터 암암리에 저항을 받았으며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획득하는데도 실패했다.
물론 그는 스탈린시대의 유산을 철폐한 공로가 있고 타고난 지적능력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일 그가 저지른 실책과 무모한 모험은 유능한 개혁적 참모들의 도움이 없었던데다 권력에 대한 자만심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61년 흐루시초프는 그해 가을부터의 핵실험 재개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크렘린에서 당정지도부와 핵전문가들간의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소련은 핵실험분야에서 미국에 뒤떨어져 있었고,그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에게 우리의 능력을 과시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핵실험재개결정은 순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흐루시초프의 기조연설과 몇몇 과학자들의 지지발언에 이어 나는 우리의 연구결과를 보고한뒤 『핵실험재개가 무익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메모를 써서 흐루시초프에게 넘겼다.
『현시점에서의 핵실험재개는 미국만을 도와주는 격이 될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실험결과를 자신들의 핵기술을 향상시키는데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핵실험이 핵실험금지협상과 군축 및 세계평화를 크게 저해할 것으로 생각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내가 보낸 메모쪽지를 읽은 뒤 나를 한번 쳐다보기만 하고는 쪽지를 접어 상의주머니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 60명의 지도부인사와 과학자들만이 참석한 만찬석상에서 그는 나의 메모를 격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사하로프박사는 우리가 핵실험을 하지 않고도 미국에 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미국은 우리보다 머리가 나쁜가?』라고 물으면서 『사하로프는 과학을 넘어서 주제넘게 정치에 대해 아는체 하고있다』고 핏대를 올렸다. 그는 이어 『정치는 우리들 전문가들에게 맡겨라.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명심하라.그것이 우리의 적이 아는 유일한 논리다. 우리는 지난해 케네디의 대통령당선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 빈회의에서 케네디는 「내게 너무 지나친 기대를 말라.내가 지나친 양보를 하면 나는 대통령에서 쫓겨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이런 인물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와 대화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사하로프군. 우리 정치인들에게 행동지침을 가르치려 애쓰지 말라. 나는 그런 무골충이 아니다』고 몰아붙였다.
말을 마친 흐루시초프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오늘은 이만하고,장래를 위해 술이나 들자』며 『사하로프의 환상을 깨기 위해 다음번 대미회담 때는 그와 동행,자본주의자들과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61년 8월 중순 다시 흐루시초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베를린장벽이 설치된 직후 우리는 사상최대의 폭발력을 가진 핵폭탄실험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흐루시초프는 브리핑도중 『사하로프박사는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깨달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지시에 따라 과업을 수행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50년대말부터 나는 대기권핵실험은 대도시의 상수도원에 병원균을 쏟아붓는 것과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믿게됐다. 나의 추산으로는 1메가톤급의 핵실험은 1만명의 방사능오염 희생자를 초래한다. 따라서 57년까지 실시된 50메가톤에 이르는 핵실험은 50만명의 인명을 희생시켰음을 의미한다.
62년가을 소련은 사상최대 폭발력을 가진 두 가지 유형의 핵실험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당국에서는 내가 속한 제1연구소의 개발폭탄 보다는 제2연구소의 폭탄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제1연구소에는 유태인 과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관리들은 비공식적으로 제2연구소를 「이집트」라고 지칭했다.
제1연구소는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두곳에서 개발한 핵폭탄의 위력이나 기술적 성능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를 실험,엄청난 방사능 피해를 가중시킬 이유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실제 제2연구소의 폭탄은 비슷한 폭발력에 무게만 더 무거워 우리폭탄이 실험에 성공할 경우 처음부터 채택할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제2연구소장은 나의 직접설득에도 허위보고서까지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결국 나는 기계공업부장관을 설득,제2연구소의 폭탄만을 실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실험은 필요없는 것이었기에 실험성공 1주일뒤 우리가 만든 폭탄도 실험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실험 하루전에야 이 사실을 안 나는 투르크멘공화국에 가 있던 흐루시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통화감도 아주나쁜 상태에서 그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며 그의 최고측근이었던 정치국원 코즈로프와 상의하라며 전화를 끊었고,결국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날 나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있은직후 기계공업부장관은 나를 불러 정부가 나의 주장을 받아들여 지하핵실험을 제외한 대기권ㆍ수중ㆍ우주에서의 핵실험 금지협약체결을 미국측에 제안할 계획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수개월뒤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케네디대통령이 수락,역사적인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됐다. 나는 이 협약으로 수백만명의 인명이 구제됐다고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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