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주민 수만명 소개후 수폭실험/미 지침서보고 낙진범위 산출/국방차관 “30명쯤 희생은 정상”/군장성 “개발은 당신들이,사용은 우리가”에 전율53년7월 우리는 개발한 수소폭탄의 실험에 착수했다. 실험은 카자흐공화국의 세미 팔라틴스크 근교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낙진의 위험성이었다. 우리개발팀은 당초 방사능 낙진이 실험장소를 벗어나 수천명의 무고한 인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수폭개발 감독부처인 기계공업부의 빅토르ㆍ가브릴로프가 이 위험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말리셰프 기계공업장관은 『악당같은 가브릴로프 때문에 모든게 골치아프게 됐다』고 불평을 표시했으나 어쨌든 우리는 황급히 여러개의 특별전담반을 편성,밤을 새워가며 대책을 세웠다. 핵폭발의 효과에 관한 기록을 담은 미국의 블랙북(검은 표지)이 지침으로 쓰였다.
이책을 참조해 우리는 수일후 폭발의 위력과 기후ㆍ토양 등을 근거로 방사능 낙진의 낙하 가능범위를 산출해 낼 수 있었다. 이책은 이후 오랫동안 핵실험은 물론 핵전략과 방어체계를 마련하는데 귀중한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우리는 2백뢴트겐 이상의 방사능 수치를 기록할 폭발지점으로부터 바람의 영향을 받는 지역내의 모든 사람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백뢴트겐만 돼도 어린이나 노약자들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위험지대내에 있는 수만명의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느냐,아니면 6개월 이상을 더 준비해 공중투하 방식으로 실험을 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주민들을 소개하는 방안은 위험지대가 도로조차 제대로 없는 지역이어서 많은 어려움과 사고발생 우려가 있었다. 반면 공중투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해 6개월 이상을 더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주민들을 소개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나 7백대의 군용트럭이 급히 동원됐다. 군부의 수폭실험 책임자였던 제1국방차관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고민할 필요가 없소. 군사작전에서 20∼30명의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고,이 실험은 일반 군사작전보다 국가안보상 훨씬 중요한 작전이오』라고 말했다.
결국 주민들을 소개시킨 것은 옳은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실험후 위험지대내에 있는 카라아울의 주민 밀집지역이 방사능에 오염됐고,당초 예상했던 1개월 후가 아니라 무려 8개월이 지나서야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4년3월 후쿠마루라는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이 미국의 핵실험 해역으로 잘못 들어갔다 무선사가 방사능 노출로 숨지고 잡은 참치 전부가 오염된 사건이 발생했었다. 카라아울의 주민들도 대피하지 않았었다면 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실험이 있기 1주일전인 53년8월5일 말렌코프총리는 최고소비예트에서 경제개혁과 동서 데탕트 추진등에 관한 중요정책 연설을 하면서 말미에 『소련은 수소폭탄을 비롯한 모든 방위수단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국제적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실험장 근처 한 작은 호텔의 어두운 로비에서 이 연설을 들었다. 기폭장치는 아직 설치되지 않은채 군용트럭들이 주민들을 카자흐 초원을 가로질러 실어나르고 있었다.
실험예정일인 8월12일 새벽 4시 우리는 자명종소리에 잠이 깼다. 아직도 지평선 저쪽으로 달리는 피난 트럭들의 불빛이 보였다.
새벽 6시30분에 나는 젊은 과학자들과 함께 폭발지점에서 32㎞ 떨어진 관측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실험탑을 바라모며 모두 땅바닥에 엎드린채 확성기의 카운트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폭발 2분전 우리는 검은색 보안경을 썼다. 카운트다운이 제로를 헤아리는 순간 섬광과 함께 하얀 구름덩이가 지평선을 온통 환하게 비추며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보안경을 벗어 던졌다.
일순간 섬광때문에 눈이 먼 듯 했지만 이내 거대한 구름이 붉은 먼지속에서 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름은 곧 회색으로 변해 오렌지빛 섬광과 함께 하늘높이 치솟았다. 핵폭발 특유의 버섯구름이 서서히 형성됐는데 원자폭탄의 핵분열 반응때의 버섯구름에 비해 버섯기둥이 훨씬 굵었다.
충격파가 고막을 때렸으며 온몸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후 약 30초가까이 음산한 진동이 이어졌다. 몇분이 지나자 버섯구름은 흉한 흑청색으로 변했다. 약 30분만에 구름은 모두 바람을 타고 산너머로 사라졌다. 방사능 측정용 비행기가 구름뒤를 따라 날아갔다.
벙커에서 나온 말리셰프 기계공업부장관이 『방금 말렌코프 각료회의의장께서 전화로 여러분의 성공을 치하하는 전화를 주셨소. 특히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사하로프박사에게 축하 인사와 함께 대신 껴안아 달라고 당부했소』라고 소리쳤다.
특별제작된 방호복을 입고 둘러본 피폭현장은 검게 그을린 건물의 잔해들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다.
잔해 옆에는 독수리 한마리가 채 숨이 끊기지 않은채 퍼덕거리고 있었다.
동행한 장교가 발로 차 독수리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55년 가을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나의 「세번째이론」(국가 기밀준수 서약에 따라 내용을 밝히지 않았음)의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실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실험은 11월22일 실시됐다.
기상전문가들은 기온의 급상승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시 신호를 보냈는데 지금 같았으면 실험을 중지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경험부족으로 기온이 상승하면 충격파의 속도도 빨라진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날밤 관사에서 축하파티를 연 네델린원수는 브랜디를 따라주며 『모든 폭탄이 오늘처럼 잘터져주면 좋겠어. 단 실험장안에서 말이야』라고 말했다. 온 좌중이 고요해졌다. 어색해진 그는 술잔을 손에 든채 일어나 『우스갯소리 하나 하지. 겉옷만 입은 노인이 「인도해주십시오. 저를 강하게 해주십시오」하고 신에게 기도를 했는데 곁에 있던 마누라가 「당신은 그저 강하게만 해달라고 하세요. 인도는 내가 할테니」라고 말했다』고 농담을 한후,『자,발기를 위해 건배』하고 잔을 들었다.
이말은 오랜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겐 채찍자국처럼 따갑다. 그의 말은 분명 농담이 아니었다. 무기의 개발은 우리가 했지만 사용은 당이나 군부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날 밤의 충격은 나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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