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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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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양심/사하로프 회고록:1

입력
1990.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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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격리된채 수폭연구 몰두/비밀실험소서 18년동안 지내/“몰인간”고뇌속 학자적 욕심도/“평화위해 독재불가피”믿음,부끄로운 기억으로「전인류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칭송됐던 소련의 노벨평화상 수상 물리학자 안드레이ㆍ사하로프박사 자서전이 최근 출간됐다. 지난해 12월 68세를 일기로 서거한 사하로프박사는 말년의 쇠약한 건강과 소 KGB의 원고 탈취 등 거듭된 방해를 무릅쓰고 이 자서전을 완성,「나의 특이한 인생역정을 회고하는 것은 후세를 위한 의무」라는 서문까지 써두었다. 이 자서전에서 사하로프박사는 「소련수소폭탄의 아버지」로 칭송받던 위치에서 불굴의 인권투쟁으로 「반역자」로 전락했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개막과 함께 다시 복권되기까지의 영광과 고뇌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을 진솔한 필치로 회고하고 있다. 또한 지난 50년간 소련의 정치ㆍ사회ㆍ과학 분야 등의 격동의 역사의 단면들을 냉철한 지성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 시사주간타임지가 「20세기의 거인의 최후의 증언」이라는 규정과 함께 발췌,소개한 사하로프 회고록을 몇차례에 나눠 요약,전재한다.【편집자주】

나는 1921년5월21일 모스크바 근교 노브데비치에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였던 아버지와 체조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의 어린시절은 비극과 잔혹,테러로 점철된 시대였다.

볼셰비키혁명 직후의 일대 혼란된 사회의 격랑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공포 속에서 숨졌다.

내 주위에 떠도는 말이란 「체포」「조사」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나의 삼촌 이반도 반혁명죄로 체포당해 유배됐다. 아버지조차 자식들에게 체제 비판의 말을 할 수 없었던 암흑같은 상황에서 나는 모스크바대학에 진학,「군사 금속학」을 전공했다.

41년6월 독일과의 전쟁으로 모스크바 대학생들은 투르크멘 공화국으로 철수,볼가강 근처 울야노스크의 탄약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44년 모스크바로 되돌아온 직후 이고르ㆍ탐교수의 추천으로 과학원 물리학연구소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탐교수는 5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나의 연구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45년8월 빵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트루먼 미대통령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발표가 실린 신문을 보았다.

이때 나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으며 두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 있을수가 없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과 전세계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변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원자폭탄에 관한 소식을 들을때마다 과학적 호기심이 발동돼 온 신경을 이곳에 쏟기 시작했다.

48년6월 탐교수는 나를 비밀리에 불러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이 특별연구팀을 구성토록 지시했으며 자네가 그 팀에 들어가게 됐다』고 통보했다.

이 특별연구팀은 탐교수가 책임자로,수소폭탄의 제조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연구팀에 참가하는 것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이를 거부할 선택권은 없었으며 내마음 한쪽에는 핵융합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고자 하는 학자적 욕심도 없지 않았다.

연구팀에서 일한지 얼마되지 않아 핵융합반응에 관한 비밀보고서(사하로프1로 명명됨)를 제출했다.

우리가 제작하려는 무기가 몰인간적인 공포를 인류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인식했지만 이미 2차대전으로 인간의 야만성이 드러난 이상 나는 새로운 과학전의 첨병일 뿐이란 자위를 했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면서 무수한 죄없는 사람들이 이 엄청한 위력을 가진 폭탄으로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핵폭탄이 결코 실제 전쟁에 사용돼서는 안되며,다만 전쟁을 억제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50년3월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비밀도시의 실험소로 옮긴 나는 이후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채 18년간을 지냈다.

우리시대가 낳은 가공할 창조물인 이 비밀실험소를 둘러싼 철조망 너머에는 가난에 찌는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가끔 보이곤 했다.

비밀실험소는 초현대적 과학시설과 강제수용소를 합친 것이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는 동안 수많은 죄수들이 엄중한 감시속에서 시설유지 등에 필요한 작업을 했다.

이 죄수들은 형기를 마치고도 비밀이 새어나갈까봐 석방되지 않은채 한층 오지의 유배지로 끌려가 일생을 마쳐야 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53년 우리는 첫번째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했다.

독재자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혹시나 현재보다 더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떨었다.

나는 이때 아내에게 『위대한 인물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인간성을 깊이 되새기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후일 이런 편지를 썼다는 기억을 되살릴때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선전의 영향력을 받아 스탈린이 저질렀던 독재도 역사적 격변기에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믿었다.

반체제 활동을 하면서 나는 당시 나의 믿음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와 전제적 압제속에 있었던 우리의 체제는 암세포와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정부가 모든 일을 숨기는 폐쇄된 사회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진실을 나는 그 당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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