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폭력으로 얻을 것은 없다(사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폭력으로 얻을 것은 없다(사설)

입력
1990.05.11 00:00
0 0

시련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며 난국의 하루하루가 신산하기만 하다. 민생과 시국의 겹친 부란이 어떻게 굴러가고 풀려질지 예측조차 난감하다.민자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재야 일부세력과 전대협이 앞장선 규탄대회는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시에 폭력과 화염병시위로 불길을 당겨 한때나마 도심을 마비시킨 난장판의 무질서를 빚어냈다.

이 가운데 미국문화원 일부가 불타고 민자당지구당사와 몇몇 경찰관서가 화염병 공격의 패해를 입고 거리는 밤늦게까지 최루탄 연기와 돌멩이가 뒤엉킨 뒤죽박죽의 난맥상을 연출했다. 이유와 원인이야 어떻든 기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질 노릇이 아닌가. 왜 우리가 다시 이지경이어야 하는가. 왜 이처럼 살벌해져야만 하는 것인가. 격렬과 극단만이 오로지 투쟁의 수단이란 말인가.

우리는 격렬시위를 주도한 과격세력에 준엄하게 묻는다. 흔들어 놓고 보자에서 뒤집어 놓고 보자는 폭력적 행동은 그 결과가 참담할 뿐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많은 쓰라린 경험에서 이 사실을 터득하고 남음이 있다. 페허위에서의 혁명적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볼 만하다. 번잡한 도심을 점거하고 거리를 콩가루로 만드는 게 과연 민중을 위하는 길인지 아무리 궁리해도 수긍이 안간다. 일몰의 어둠을 이용해 불안을 가중시킨 처사는 도무지 정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자 한다. 합법적 정부라도 뒤집어 놓고 보면 목표를 달성한다는 무책임성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을 밝혀둔다.

설사 현실의 부조리와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더라도 수단의 선별은 반드시 심사숙고되어야 한다. 그 길은 혁명이 아닌 꾸준한 개혁의 기운으로 열림을 일찍 깨달아야 한다. 늦고 더디더라도 참아야지 불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은 단순한 파괴공작에 지나지 않는다.

10일 치안관계 4부장관은 사회질서의 위협에 강경대응을 표명하고 나섰다. 철저한 법질서의 확립을 통해 민생과 시국치안을 한몫에 잡아 난국을 헤쳐나가겠다는 강한 결의를 밝혔다. 노사와 학원의 폭력,투기와 퇴폐나 민생치안을 공권력에 의한 「엄정」한 법집행으로 방지하고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공안당국에 당부함은 법의 집행에 있어 엄정과 함께 공정을 기해 저항없는 실효를 거둬달라는 것이다. 공직자는 물론 기득권층이 솔선해 법질서를 지키고 어기면 가차없는 응징을 받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법의 위력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요구되는 것은 공권력에만 의지하는 타성을 억제하고 민심의 흐름을 먼저 정확히 파악해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터주지 않으면 안정과 희망은 바랄 수가 없다. 현재의 난국도 그 이유를 따져들면 민심의 외면을 몇번이고 지적받아 마땅하다. 개혁의 답보와 역행이 혼란을 초래하였음은 공통된 인식이다. 이 공통의 인식을 위정자들이 무시했다는 불만은 공공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엄정을 외쳐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난국극복을 원한다면 강경과 폭력저항을 배제함이 마땅하다. 원인과 배경을 합리적으로 추궁하고 밝혀가며 시인할 것은 그렇다 인정하고 자제할 것은 억누르는 도덕성과 인내 그리고 민주적 질서의식이 있어야 오늘의 시련을 큰 상처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기는 떠들어대서 쫓아낼 수 없고 끈기로 풀어나가는 길이 최선임을 강조해 두는 바다. 이것이 또한 민주화의 고된 첩경이기도 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