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한국가서 살고 싶다”희망한국의 베트남참전 당시 출생한 한국인 혼혈아들이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전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씨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국제사회복지협의회(회장 정주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국제사회복지개발주식회사의 베트남지사장 김병하씨(61)는 베트남의 한국계 2세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어 분명한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나 대략 5천∼1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67ㆍ68년 맹호사단 통역관으로 베트남에 근무했던 김씨는 『이들이 사이공(현 호지명시) 붕타우 칼란 나트랑 퀴논 안케 다낭 후에 등 한국군 주둔지였던 도시에 주로 살고 있으며 호지명시에 만도 최소한 1천여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면서 자신이 1차로 파악한 46세대 90여명의 명단을 제시했다.
64년9월 비둘기부대를 효시로 73년3월까지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약 32만명. 여기에 민간 기술자 기능공 개인사업가 등까지 합치면 전쟁기간중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은 약 40만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베트남사회에서 「라이 따이한」(한국계 혼혈아)이라는 약간 경멸조로 불리는 한국계 2세들은 대부분 취학이나 취업을 위해 신원을 속이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 신원이 노출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과거 한국군이나 민간기술자들이 근무했던 지역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발견되며 나이는 대략 15∼20세 초반을 이루고 있다.
과거 한국인 기술자들이 집단으로 일했던 호지명시 쭈민장가에는 아직도 많은 「라이 따이한」들이 살고 있다.
이곳서 초라한 밥집을 경영하고 있는 구엔ㆍ티ㆍ안 여인(53)은 『라이 따이한들이 베트남 사회에서 크게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으나 취학과 취업에는 다소 제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안 여인은 『라이 따이한들은 성적이 좋지 않으면 의무교육기간인 9년밖에 학교를 다닐 수 없으며 정부기관이나 정부운영회사에서는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취업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면서 대부분의 라이 따이한들은 날품팔이나 재봉일 자전거 수리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길거리에서 음식이나 복권 등을 팔아 그날 그날을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최대희망은 베트남인의 최대희망이 「해외 탈출」이듯이 「한국행」이다.
현지처들이나 라이 따이한들은 그러나 너무나 흘러버린 긴 세월의 간격탓인지 아버지와의 재결합은 거의 포기하고 있다.
다만 한국에 가서 기술을 배워 직장을 얻게 되거나 한국기업이 앞으로 베트남에 많이 진출할때 취업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약 3만명으로 추산되는 베트남의 미국계 혼혈아(아메라시안)들은 3년전부터 실시되는 있는 「질서있는 이주계획」(Orderly Departure Program)에 따라 미국행이 허용되고 있다. 김씨는 국제사회복지개발주식회사 명의로 라이 따이한들의 직업교육을 위한 직업학교 설립을 베트남정부에 신청,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호지명시=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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