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돌 맞아 영웅추앙/“역사 저항한 시인”호칭/생가는 문학 성소로… 20만 추모/언론들,게재경쟁… 정부도 찬사「닥터지바고」의 작가 보리스ㆍ파스테르나크가 소련에서 부활,러시아문학의 거장으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파스테르나크는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뒤이은 문학의 해빙과 함꼐 「진실을 추구한 고독한 작가」로 독자들로 부터 추앙 받고 있다. 모스크바 근교 페레델키노의 생가는 이미 지난 2월 파스테르나크 기념관으로 명명돼 추모객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소련 언론들도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또 최근 프랑스에서는 그의 서한집이 발간돼 파란많은 생애의 작가답게 스탈린과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인간적 고민이 감동깊게 묘사되고 있다.
역사에 저항한 시인으로 새롭게 지칭되고 있는 파스테르나크의 생가에는 지난 2월 기념관 개장이래 무려 20여만명이 다녀갈 만큼 소련문학의 새로운 성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문인,독자는 물론 일반관광객들에 이르기 까지 2층 목조의 생가를 둘러보고 『노벨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조국을 떠나지 않겠다』던 파스테르나크의 고뇌를 실감하고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고뇌와 함께 일면 모순의 작가였다.
금세기초 러시아 문학계의 주류였던 상징주의나 미래파로 부터 독자적 창조를 고집했던 파스테르나크는 처음 러시아 혁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나 이내 혁명에 대한 「환상」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같은 실망을 공개적으로 표출시키지는 못했으며 이같은 「동기부족」으로 인한 자학과 좌절감에 허덕였다.
특히 1934년 동료문인 오시프ㆍ만델스탐이 스탈린을 비판하다 체포된 사건과 관련,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의 호출을 받아 직접 그를 면담했는데 이때 받은 모멸감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서한집에서 나타나 있다.
당시 만델스탐 사건에 대한 소견을 묻는 스탈린의 질문에 파스테르나크는 시종 『모른다』고 일관했으며,이에 스탈린은 『당신은 동료를 옹호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파스테르나크는 평소 특정사안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같은 어정쩡한 태도에 대해 스스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과의 면담이후 그는 한 편지에서 『모든 것은 파괴되고 창조력은 끝났다』고 자조적인 심정을 밝히고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또 전쟁의 속성을 「비인간적인 거짓」으로 간주해 왔는데 「닥터 지바고」에 이같은 관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닥터 지바고」는 「노비미르」에서 만난 만년의 연인 올가ㆍ이빈스카야로 부터 모티브를 얻었다. 이빈스카야는 작품속의 여주인공 라라처럼 파스테르나크 때문에 투옥과 강제수용소 생활 등 역시 파란많은 생애를 겪어야만 했다.
「닥터 지바고」가 이탈리아 출판업자에 의해 출간된후 소련 당국은 물론 작가동맹 등 동료문인들로 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게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진 1958년10월 흐루시초프에게 편지를 보내 노벨상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과 집을 보호해줄 것을 탄원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같은 탄원에도 불구하고 문학재단과 작가동맹은 1960년 파스테르나크 사후 그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고자 진력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생가는 집기가 부서지는 등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며느리 나탈리아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그의 생가 기념관에는 그가 임종한 침대,그리고 방문객들의 접근을 사양했던 서재 등 이 당시 모습대로 보존돼 있다.
또 당시 수많은 외국문학을 소개했던 번역가답게 많은 외국어사전도 함께 비치돼 있다.
소련당국과 언론이 사후 1백주년을 맞는 파스테르나크에 보내는 헌사는 전례없이 파격적이다.
58년 작가동맹으로 부터 제명 당했던 파스테르나크는 이제 새로운 영웅으로 복귀했으며 거의 모든 소련신문과 잡지들은 그의 시와 소설을 다투어 게재하고 있다.
또 유명한 모스크바 현대미술관에는 올들어 약 두달간이나 파스테르나크관이 개관 되기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복권을 위해 노력해온 동료문인들은 그를 현대 러시아 문단의 「시성」으로 추앙하고 있다.〈파리=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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