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이 오는 5월1일로 합당 1백일을 맞는다. 『국민과 사회발전의 수준에 못미치는 지난날의 정치를 개혁하는게 국민의 뜻… 중도민주세력의 큰 국민정당을 탄생시켜 새정치질서를 확립해 나가기로 했다』는 지난 1ㆍ22합당선언의 정신은 그후 1백일 동안 과연 어떻게 구현되고 변색 또는 퇴색되었을까. 3당합당을 「신사고」와 「명예혁명」으로 높여세우던 당시의 자체평가는 아직 유효한 것일까.4ㆍ17청와대 회담때 노태우대통령은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을 향해 『당내분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민자당이고 그 다음이 나이며 김최고위원은 세번째』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차 내분이 수습된 4월19일 10일만에 당사에 나온 김최고위원은 『노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는게 3당합당의 중요대목』이라고 말했다.
두사람의 말은 일견 무관한것처럼 보이지만 행간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합당이전에 궁지에 빠져있던 상대방을 서로 구해주었다는 정반대의 시각을 읽게된다.
두차례에 걸친 민자당의 내분과 갈등도 어쩌면 이러한 시각의 편차 때문에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4당구조를 여지없이 허물며 거대여당을 급조 탄생시킨 「1노2김」과 「야대」의 수장에서 어느날 갑자기 소야로 전락한 「1김」이 합당정국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는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있는 것이다. ▲합당전후 ▲합당의 변과 관련된 그간의 행태 ▲민자당 1차내분 ▲민자당 2차내분 ▲당ㆍ대권문제 ▲앞으로의 정치적 입지문제 등과 관련한 「1노3김」의 이해득실과 향후 정치적 위상변화의 점검을 통해 합당정국 「1백일」을 돌아본다.
◎노태우 대통령/거여구축 이면엔 득보다 실이/전당대회후 통치력 강화 전망
노태우대통령은 4ㆍ26 청와대 4자회동을 계기로 단일성 집단지도 체제를 갖춘 거여 민자당의 총재로서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했다.
노대통령이 갖는 3당합당의 가장 확실한 득은 바로 이점으로,대통령 중심제하의 권력구도에서 명실상부하게 권한과 책임을 전유하는 통치권자가 된셈이다. 그럼에도 3당합당후 4개월여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단기적 손익계산을 부여해 본다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 「단기적」 이라는 전제는 국정운영권자의 정치적 득실은 임기끝 무렵에서야 판가름 날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때문.
노대통령의 3당합당에 관한 득실은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적 안정ㆍ통치권 및 국정운영의 효율화 여부와 대국민이미지 또는 신뢰도의 부침등이다.
우선 정치적 안정의 측면에서는 일단 부정적 평가가 긍정쪽보다는 상대우위에 놓여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4당체제하의 정치적 불안정을 타파한다는 당초의 의도가 반전된 셈이다. 그동안 나타난 민자당의 잘못된 정치행태는 오히려 보선에서의 참패결과를 낳아 거여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1ㆍ2차의 당내분과 이로부터 야기된 정치적 불확실성은 사회등 제반분야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파급시켰다.
두번째,통치권 및 국정의 효율화 여부 측면에서도 뚜렷한 긍정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입법부 의석의 3분의2를 능가하는 거여를 확보,탄탄한 입법의 바탕을 마련했음에도 국회의 대행정부 지원은 아직도 미미한 형편이다.
3당 합당시 노대통령이 통치권을 효율적으로 장악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심각하게 부각되는 대목은 바로 3당합당으로 인한 통치권의 누수현상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좋게는 민자당의 본격궤도 진입을 위한 민주적 진통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으나 내분과 갈등 과정에서 빚어지는 권력의 균분화 현상,여권내 위계질서의 혼돈등이 통치권 누수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대 국민이미지 신뢰도등의 측면에서도 노대통령은 합당전보다는 상대적 하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가 있다. 사실 4당체제 당시 노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애착과 애정을 받은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비록 약한 대통령으로서의 별칭은 있었으나 많은 국민들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았으며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발전을 위해 애쓰는 대통령」으로 평가 받았다. 합당이후 거여를 배경으로 한 노대통령의 이미지는 끝없는 터널과 같은 경제난국의 지속,최근의 물가ㆍ부동산ㆍ수출ㆍ증시ㆍ노사분규 재연조짐등 갖가지 부정적 현상과 겹쳐 합당전과는 분명 다르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가지 측면의 득실은 단기적 손익계산임은 물론 일시적 현상이라고 치부해야 할 것이다. 합당이 뿌리가 다른 이질집단의 집합이며 따라서 일정기간 정제과정이랄 수 있는 용광로속의 용해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향후 위상은 지금과 달리 전당대회 직후부터 상향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함께 통치권장악의 효율화와 국정의 효율화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노대통령 위상의 상향곡선은 91년말께 피크가 될 것으로 전망되며 92년 상반기께 부터 차기 당권향배와 관련해 하향추세의 완급이 가려질것 같다. 그사이 당내의 각계파 보스 또는 그밖의 주요 인물의 위상변화가 상ㆍ하향추세의 결정적 변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 노대통령의 위상변화는 권력구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노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끝무렵에 스무스하게 후계구도를 설정할 경우 총체적으로 가장 확실한 정치적 득을 취하게 될 것이다.【이종구기자】
◎김영삼최고위원/힘겨룸이 각서설로 손실 자초/국민상대 「큰정치」등 다각모색
정치이력에 급격한 「변곡점」을 찍으며 여권지도자로 변신한 김영삼최고위원에 있어서 지난 1백일은 또한 드러매틱한 「처변」으로 점철됐다고 봐야할 것 같다. 1ㆍ22합당선언 당시 노태우대통령 오른쪽에서 뒷짐을 진 다소 「사나운」 모습으로 서있던 그는 적어도 방소전까지는 자신의 신사고를 따르지 못하는 지지자들에게 적극적 몸짓으로 다가가려 했던 것 같다.
청와대서 노대통령과 나란히 각료회의를 주재하며 「체질연습」을 하는가하면 관훈토론회선 『노대통령이 연정을 제의했지만 내가 합당을 주장했다』고 자신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했으며 국방위 날치기 사건때는 이를 되돌려 「새정치」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거대여당에 대한 여론의 생래적경계심이 싹트고 화려한 합당수사 뒷전에서 자기몫을 찾으려는 후진적 행태가 당을 좀먹고 있음을 놓쳤던것 같다.
이연장선위에서 방소는 그에게 분명히 「화려한외출」이었다. 국내 정치지도자론 처음 고르바초프 소대통령을 만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상황은 그러나 그의 기대와 자신을 급속히 뒤엎어 갔다. 당장 그는 야당시절 자신이 즐겨 여권에 던졌던 『국민을 무서워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보선패배후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에 낭패감을 느껴야 했다.
이같은 낭패감을 맛볼 여유도 잠시. 박철언 전정무장관측에 의해 그의 방소행적이 재구성되면서 그는 『외교를 정치적 양명차원으로만 생각』하는 「생각없는」 정치인으로 그려져 갔다.
김최고위원은 이같은 사태전개가 자신을 겨냥한 구여권의 조직적 「파워테스트」라고 판단,「공작정치」 타파와 당풍쇄신을 내세워 역공을 폈다. 민주계의 뒷받침을 받은 그의 뚝심과시는 급기야 박전장관이 『김최고위원의 정치생명… 』운운하는 극한상황을 초래했다. 10여일에 걸친 김박 힘겨룸의 결과 그는 노대통령의 대리인이자 합당동지였던 박전장관을 퇴진 시켰다.
그러나 차제에 당권등 대세를 움켜쥐려는 그의 드라이브는 당권각서설 파문을 초래,「수세」를 자초했고 또한 악화되는 경제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스스로 당내분수습을 서둘러야 하는 형국에 이르른게 그의 정치적 대차대조표.
우선 정치안정을 위한 새정치질서 모색을 표방한 그의 「합당의 변」배경에 4당 시절 제3당으로서의 급속한 입지축소를 피할 수 없다는 고려가 깔려있었음을 부인키 힘들다.
여기서 그의 정치적 득실을 판단하는 분석적도구로 이른바 「정치력」과 「정치실행력」이란 두개의 잣대를 도입해 볼 수 있다. 전자를 대중적지지기반,후자를 여권내 의사결정 잠재력이라고 단순화시켜보면 그는 여권변신은 일단 후자를 획득키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박전장관과의 힘겨룸은 당을 포함한 구여권이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노골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정치실행력이 크게 축소된게 사실. 또한 그의 권력의지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던 여론에 투영된 당의 파행적 모습과 각서설로 야기된 「추문」은 그의 정치력에도 심각한 손상을 안겼던것 같다.
합당 1백일에 선 그는 이제 모든것을 털고 1ㆍ22합당정신으로 되돌아가 새출발을 시도하고 있다. 자기마음 같지 않은 국민을 상대로 그는 35년 정치인생을 건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이유식기자】
◎김종필최고위원/노련미 넘치는 조연역에 자위/내각제로 「제2개편」주도 의중
정치적 노련미가 뛰어난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에게 있어 3당통합 이후의 1백일은 분명 그의 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리바이벌 무대」였다.
김영삼최고위원과의 「우정과 소신」을 바탕으로한 정계개편의 「산파역」으로 시작해 박철언 장관의 발언파문으로 인한 1차내분의 거중조정 역할을 자임하기까지 적어도 나름의 「처신과대응」에 대한 대국민평가가 부정보다 긍정이 많았던 것은 사실.
그런가하면 「마루밑의 받침대」,「무관의 일꾼」,「견마지노」,「신당의 목수」,「상담역으로서의 최고위원」 「나란히 걷지않고 뒤따라간다」등 그의 입에서 나온 숱한 정치적 수사들과 겸양은 세가 가장 뒤떨어지는 등 그럴수밖에 없는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호감을 주는 「조연」으로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여소야대 당시 캐스팅보트를 쥐고있으면서도 평민당과 민주당의 선명경쟁을 위한 파워게임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던 시절에 비하면 월등한 영향력의 향상이 아닐 수 없다. 4당구조의 「국회정치」가 거대여당의 「당정체제정치」로 반전되면서 그의 위상은 높아진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대아적 협조체제」라는 그의 거듭된 역설에도 불구,민자당은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었고 「3균분론」등 지분에 대한 동등대우를 남처럼 요구치 않았음에도 좀체로 균열상의 수습이 수월하지 못했던 점등은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케 해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이 시점에서 만큼은 여전히 민정ㆍ민주계라는 당내 양대계보에 비해 열세에 머물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피할 도리는 없으며 동시에 지금까지의 호의적 평가가 어부지리 정도로 해석된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는 셈이다.
따라서 김최고위원으로서도 적절한 시기에 「힘의 보강」을 위한 착점을 모색할 것이라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관측이며 그를두고 「미완성 정치인」「휴화산」이라고 일컫는 측근들도 그런때가 오기를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그에겐 억지로 대권을 잡을 수 없는 「운명적 한계」가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대권의 수행능력에 대한 어렴풋한 신뢰가 배수진으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주어진 상황아래 자신의 처지를 극복,약진하는 방편을 내각제 개헌문제에서 찾을것으로 보인다. 분할된 권력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빠르면 「여름정국」의 이슈로 내각제개헌을 제일먼저 떠올림으로써 「제2의 정계 개편」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나설 공산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를위한 장애요인 또한 엄존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순 없는 현실. 즉 김영삼최고위원과의 원만한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되느냐의 여부와 민정계의 잠재적 구심력이 박태준최고위원대행의 위상변화가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최고위원의 직설적이고 충동적인 정치스타일은 JP의 음유적 접근방식과 얼마든지 부딪칠 소지를 안고 있으며 박대행역시 민정계가 갖는 대계보의 영향력을 쉽게 숨기려들지는 않을게 틀림없다.
결국 김최고위원으로서는 「야당적개혁」을 선도해야 하는 부담이 YS보다 훨씬 덜한 점을 십분활용,정국안정을 향도하는 조언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하면서 향후를 위한 구체적 조망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정진석기자】
◎김대중평민총재/“여권위기가 득될것 없다”관망/명분큰 「야권통합」엔 부담안아
김대중 평민당총재는 3당합당으로 거대한 민자당이 출범하자 가장 당혹스러워했던 장본인이었다. 「야대정국」에서 제1야당의 총수로서 사실상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김총재로서는 합당이 자신을 제외시킨채 이뤄진데다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자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대야가 삽시간에 소야로 전락하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치적 운신이 급격히 좁혀지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그가 3당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면서 『국민의 뜻을 저버린만큼 결국 실패하고야 말것』이라고 처음부터 단정하고 나온것도 야당전래의 비난성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급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때 합당직후에는 김총재는 「실」쪽에 설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실」도 그가추구해온 정국구도가 훼손ㆍ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측면에서의 「실」일뿐 그가 확고히 갖고있는 지지도등의 손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1노2김」이 갖게될 손실과는 모양을 달리한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민자당이 1ㆍ2차 내분을 겪으면서 합당의 주역인 「1노2김」이 모두 적지않은 정치적 손실을 겪었지만 김총재는 변화를 겪지 않았다.
김총재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자신에 대한 절대적 지지기반으로 전환시키고자 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김총재가 3당합당에 대한 반대투쟁을 장기적 포석아래 화전양면으로 추진하고 있는것도 이때문이다.
김총재한테는 여권의 손실이 곧장 반사이익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는 김총재에 대한 지지성향과 입지등이 「1노2김」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총재로서는 민자당의 추태와 신여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저하가 반가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위상은 변함이 없는데 경쟁자들의 위상이 실추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넓혀지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영원한 맞수」인 김영삼씨가 민자당내분의 당사자라는 점은 아무리 내색하지 않더라도 기분좋은 대목인 것이다.
그러나 김총재는 80년 봄의 상황과 6ㆍ29선언후의 변화무쌍한 정국추이를 경험하면서 여권의 퇴락이 곧바로 반대세력의 부상으로 귀결되지 않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김총재가 측근들을 통해 민자당 내분을 혹평할 뿐 직접나서지 않는것도 「여권의 위기시점」에서 그가치른 호된체험에서 비롯된다고 할수 있다.
또 김총재로서는 「1노2김」이 막바지에 몰릴경우 자신 또한 비슷한 환경에 처할수 있다는 「가상」을 버릴수 없는 것이다.
단기적 관점에서 볼때 결과적으론 합당의 결과는 민자당의 당내파동으론 실이 득으로 변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김총재도 3당합당으로 정치적 부하를 갖고있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3당합당에 대한 반대세력의 통일,즉 야권통합이다.
김총재는 80년봄의 김대중김영삼경쟁이 당시의 신군부세력 등장에 빌미를 주었다는 지적과 87년의 야권대통령 후보단일화 실패가 문민정부출현을 좌절시켰다는 비난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잘알고 있다. 특히 3당합당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게 됐다고 판단하고 있어 야권통합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보다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권통합 또한 쉽지 않다는 점에서 김총재는 적지않은 부담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김총재는 김영삼최고위원이 합당정국에서 정착하지 못할경우 대권고지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인해 대권고지가 그에게로 선뜻다가설 것으로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합당정국이 단기적으로 「득」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예측이 어렵다는데 김총재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이병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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