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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정치의 망령(이성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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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정치의 망령(이성춘칼럼)

입력
1990.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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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1>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952년 5월25일 영시를 기해 임시수도인 부산을 비롯한 경남 전남북 21개시군 일원에 공비소탕과 치안확보를 이유로 계엄령이 느닷없이 선포됐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시내에는 근한달째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이란 이름으로 「반민족적 국회의원은 물러나라」는 비라가 붙여지고 국회의사당인 경남도청강당에는 연일 데모데가 포위,「직선제개헌안을 즉각 통과시켜라」 「국회를 해산하라」고 악을 써 험악한 분위기가 지속됐던 것이다. 당국은 이날 계엄선포와 함께 국제공산당과 연루혐의가 있다며 야당의원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고 다음날에는 국회의원들의 등원버스를 헌병대로 끌어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며칠새 양병일 이석기 장홍염 정헌주 이용설 곽상훈 서범석의원등 11명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고 주요야당인사들은 피신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대통령의 속셈은 빤했다. 당시 국회는 야당세력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헌법에 규정된 국회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렵기 때문에 국민직선의 개헌안을 통과시키도록 관제국제공산당연루공작을 펴기로한 것이다.

이박사는 국회가 통과시킨 계엄해제결의안을 깔아뭉개고 또 트루먼미대통령 유엔한국부흥위원단 트리그브ㆍ리유엔사무총장이 보내온 야당탄압에 대한 경고서한과 각서도 묵살했다.

결국 이박사는 국회가 온갖 압력과 협력에 못이겨 직선을 가미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의원도 석방하고 슬그머니 계엄도 해제했다.

<예화2>

54년12월18일 하오 해공 신익희 전국회의장은 자택으로 배달된 석간신문속에 든 낯선편지를 읽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북한인민위원회 최고위원회의 발신으로 된 이 서한은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정치협상을 하자』고 촉구하는 호소문이었다.

해공은 바로 한달반전 자신이 『뉴델리공항에서 조소앙과 중립화통일문제를 논의했다』는 함상훈전민국당선전부장의 허무맹랑한 발설로 온갖 곤혹을 치른바 있었는데 이번에는 느닷없이 북한으로부터 서한을 받게됐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북의 호소문은 같은날 해공외에도 곽상훈 김상돈 정일형 김준연 소선규의원등의 집에도 배달되었다. 이사실은 이틀뒤 국회본회의에서 김준연의원이 『야당중진들에게만 보낸것이 아무래도 조작한 느낌을 준다』며 진상조사를 요구함으로써 정치문제로 비화됐다.

사건이 발생한지 20여일뒤 손원일국방장관은 『불온문서는 조사결과 헌병사령부5부장의 모의에 따라 동부소속문관인 이모ㆍ권모가 조작,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하여 실체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에 국회는 격론끝에 진상조사단을 구성했고 여기에 출두한 당시 원용덕헌병총사령관은 『북괴의 평화협상론을 지지ㆍ동조하는 제3세력이 국내에 침투한 사실과 증거품인 그들의 위장평화협상호소문을 압수한 것을 계기로 야당중진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파악하기위해 내가 투입하도록 지시했다』고 태연히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원중장이 불온문서를 투입한 것은 대야당교란책이었다. 즉 바로전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안통과에 반발하여 야당세력이 단합,단일 야당창당에 뜻을 모으자 이를 방해,교란하기 위해 이같은 짓을 자행한 것이었다.

<예화3>

60년대후반 Q씨는 사원50여명의 소규모 봉제공장을 경영하는 성실한 중소기업인이었다. 어느날 야당의원이된 죽마고우를 만나 그의 딱한 형편을 보고 요즘돈 기십만원을 용돈이나 쓰라고 2∼3차례 보내줬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을 몰고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야당에 정치자금을 주고 있다는 소문이 번지고 어느날 특별한 이유없이 세무사찰팀이 들이닥쳤으며 거래은행도 차가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불황까지 겹쳐 사업은 시름시름 하다가 빚만 늘어갔고 결국 그는 문을 닫고 이민길에 올랐다.

× ×

이른바 「공작정치」 「정보정치」가 우리정치사상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히 가릴수가 없다. 하지만 역대공화국과 역대정권이 장기집권과 정권안보를 위해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자행해 온것은 분명하다. 즉 야당분열기도외에 야당등 반정부인사에 대한 미행,도청,동정감시,협박,회유,그리고 자금줄의 색출등이 공작정치의 주종을 이뤄왔다.

앞의 예화에서 보듯 50년대에는 국민을 무시한채 공개적으로 자행한데 반해 5ㆍ16후 제3ㆍ4공화국 때에는 과학화ㆍ지능화하여 세련되게 암행수법을 활용했고 5공때도 이의 일부가 지속되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공화국에 들어 권위주의체제를 탈피,민주화를 지향하면서 공작정치­정보정치는 사라진 것으로 모두가 인식해 왔다. 그런데 그 망령이 되살아 났다고 시비가 벌어졌다. 그것도 정부ㆍ여당과 야당간에서가 아니라 여당내부에서 제기됐다는데에 국민은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민자당의 김영삼최고위원은 지난주 나라전체를 술렁이게 했던 박철언정무1장관과의 불화ㆍ공방과정에서 『공작정치가 되살아나 나자신에 대해서도 진행중이다. 나는 반드시 공장정치를 뿌리뽑겠다』 『내가 30년 야당생활을 하면서도 공작정치를 이겨냈는데 그리 간단히 죽을줄 아느냐』고 말해 시선을 모았다.

김최고위원은 공작정치의 자세한 내용에는 함구했지만 민주계인사들은 김씨와 주변인사들에 대한 도청과 동정감시,뒷조사등 과거와 같은 작태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김씨가 노발한 것은 자신의 자금줄을 견제,차단하고 후원자를 조사한것으로서 바로 이는 박장관측의 계략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민정계는 『김씨가 아직도 여당체질에 익숙치 못한데서 오는 과민반응이다. 동정감시가 아닌 일상적인 요인동정의 체크일뿐』이라면서 『정치자금의 경우 합당한 이상 창구를 단일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김최고위원에게 요청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공작정치­정보정치가 단순한 당의 내분과 감정차원이 아니라면 구체적 진상과 사례를 낱낱이 밝혀 국민의 의혹을 시원하게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도청이 있었고 자금원을 견제하고 후원자를 뒷조사 한것이 사실이라면 거대여당의 최고지도자답게 떳떳하게 밝혀야 한다. 그토록 노기를 띠며 밝혔던 일을 끝내 흐지부지 해 버린다면 국민을 우롱하는셈이 될것이다. 공작ㆍ정보정치뿐이랴. 말많은 방소와 합당비사도 아울러 공개해야 한다.

마침 민자당의 3인최고위원이 내분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늘 청와대에서 모임을 갖는만큼 이자리에서 공작정치의 진부를 확인하고 또 사실이라면 시정책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민주적 후진국에서나 횡행하는 공작정치­정보정치의 폐해가 얼마나 큰가는 이루말할 수 없다.

이땅에 참된 민주화를 위해서는 공작정치의 망령이 재생되어서는 안된다는게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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