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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직지킨 박물관의 산역사/타계한 김재원 초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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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직지킨 박물관의 산역사/타계한 김재원 초대박물관장

입력
1990.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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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불모지 고고학 개척/“발굴은 파괴” 유적보존 앞장12일 타계한 초대국립박물관장 여당 김재원박사는 한국 박물관의 산 역사였다.

45년부터 70년 정년퇴임까지 25년간 국립박물관장직을 맡아 광복후 불모지인 우리나라 고고학을 개척했다. 그는 일본으로 쫓겨가는 일인학자 아리미쓰(유광교일)를 붙잡아 우리나라 최초의 유적박굴인 경주 호우총을 발굴했다.

또 역사학연구에 고고학적 접근방법을 첫 원용 「단군신화의 신연구」란 논문을 내놓아 사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여당은 박물관장재직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후진양성에 힘을 쏟아 지금은 고고학계의 대가가 된 김원룡씨를 미뉴욕대 대학원에 보내 학위를 받도록 했고 미술사 분야의 젊은 연구생인 안휘용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가 록펠러 재단지원으로 미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받을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도움이다.

그는 한국 최초로 문화재 해외전시를 기획,57년 12월부터 59년 6월까지 미8개 도시에서 전시를 한데 이어 61년 3월부터 62년 6월까지 영·네덜란드·프랑스·서독·오스트리아등 5개국에 한국 문화를 소개했다.

또 6·25때는 당시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의 안전소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국립박물관장 재직시 『발굴은 파괴이므로 되도록 하지 않는것이 좋다』는 원칙을 고수,유적보존을 위해 불가피했던 긴급발굴 외에는 가능한 한 손을 대지 않았다.

김박사는 1909년 2월22일(음력) 함남 함주 출생.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에 입학,교육학·고고학을 전공했다. 1934년 이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벨기에 켄트 국립대에서 칼·헨츠교수의 조수로 6년간 일하다 40년 귀국,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경성여의전에서 강사로 재직하다 초대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경여의대 출신인 부인 이채희씨와의 사이에 3녀1남을 두었는데 맏딸 리나씨(홍익대 교수)가 하버드대학에서 동양미술사,막내딸 영나씨(덕성여대 교수)가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3부녀 미술사 가족」으로서도 학계에 알려져 있다.

한병삼 국립박물관장 임효재 서울대 박물관장등 고고학 관계자들은 『여당 김재원박사는 그분의 출중한 능력으로 격변하는 사회상 속에서 정치등 다른 길로의 참여유혹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80평생을 한결같이 한자리를 지켜,「민족문화의 발굴과 수호」라는 천직을 고수한 것은 경외할 만 하다』고 강조했다.

저서는 장녀 리나씨와 펴낸 「한국미술」 및 「한국 지석묘연구」 「단군신화의 신연구」 「호우총과 은령총」 「한국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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