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안식처없이 떠돈다/일,발굴ㆍ송환 외면 방치/한국 정부서도 무관심/반세기 가까이 「행불」처리…제사도 못지내태평양전쟁에 동원된 한국의 군인ㆍ군속들과 징용자 군부 정신대 등은 두번 죽었다.
남의 나라가 일으킨 전쟁에 끌려가 이름 모를 산하에서 비명에 숨진 것이 첫번째 죽음이고,죽어서도 안식처를 얻지못해 아직껏 영령이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그것이 두번째 죽음 아닌가.
전쟁기간중에 숨진 수십만명의 한국인 가운데 지금까지 유해나 유골이 국내로 송환돼 유가족들에게 인계됐거나 합동으로 안장된 것은 1만위도 채 못된다. 그중에서도 정부간의 협력으로 공식 송환된 것은 겨우 1천1백88위 뿐이다.
일본정부는 1958년 태평양지역에서 전사한 2만2천여구의 유해를 일본으로 거둬들여 일본인 유해는 모두 유가족에게 돌려주고 성대한 위령 행사까지 치렀다.
그러나 한국인 2천3백28구는 나무상자에 담아 후생성 지하실에 짐짝처럼 쌓아두었다. 이 사실을 안 한일 불교 친선사절단과 민단 등의 항의가 빗발치자 일본 정부는 1971년 6월 동경 메구로구(목흑구)의 유덴지(우천사)로 옮겨 공식적으로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선 69년 제3회 한일 정기 각료회의에서 유족이나 연고자가 확인되는 것은 유족에게 인계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져 70년에 처음으로 1구가 공식 송환됐다. 이어 71년에 2백47구,74년에 9백11구 등 84년까지 1천1백88구가 송환되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1천1백40구는 아직도 우천사에 남아있다.
비공식적으로 송환된 것은 72년 12월 북구주지역 탄광 징용자 유해 2백40구를 일본의 민간단체가 갖고 들어와 광주 시립공원묘지 납골당에 봉안한 것과,76년 10월 이시하라(석원)라는 일본인이 수습해 망향의 동산에 안장한 2백19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밖에 개인적으로 몇구씩의 유해와 유골이 송환되기는 했으나 숫자는 미미하다.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해를 수습한 것은 77년 해외희생동포 위령사업회가 남양군도 파라호에서 우연히 발견된 5천여구를 갖고 들어온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
억울한 영령들이 왜 이토록 냉대를 받아야하는가.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고 싶어 철저히 한국인 희생자의 유해발굴및 조사사업을 외면했고,한국정부는 전후 반세기가 가깝도록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남양군도의 파라호에서 한꺼번에 5천구의 유해가 우연히 발견됐다는 사실은 동남아지역과 남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에 한국인 희생자의 유해가 엄청나게 많이 방치돼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뿐 아니라 일본에도 곳곳에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해가 처박혀 있다. 탄광 군수공장 발전소 및 댐건설 현장등에 동원됐던 징용자들이 갖가지 사고와 일본인들의 린치 등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유해는 절이나 신사 등에 깊숙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1949년 1월 일본이 필리핀 지역에서 수습해 사세보(좌세보)항으로 가져온 시체와 유골 가운데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시체 4천5백19구,유골 3백7구등 4천8백22구가 포함돼 있었다.
시체와 유해상자에는 로마자로 이름이 표기돼 있어 얼마든지 유가족확인이 가능했는데도 일본정부는 무연고 유해로 처리,한꺼번에 화장해 사세보가마(부) 해안의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다.
일본에서 징용자의 유해 보관실태를 조사한 석태연스님(53ㆍ일본 조계종 한문화원원장)과 서남현스님(39ㆍ일본조계종 관장)에 의하면 북해도 미바이(미패)탄광지역에서 4백15명등 극히 제한된 일부 지역에서 낙반 사고등으로 숨진 징용자가 2천명 이상으로 확인됐는데,그들의 유해는 해당지역의 사찰이나 신사 등에 무연고자로 보관돼 있다는 것이다.
서남현스님은 『일본 전국의 각사찰과 신사 공동묘지 등을 샅샅이 뒤지면 엄청난 수의 무연고자 유해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며 한국정부가 발굴사업은 커녕 실태조사조차 하지않고 있는 것은 정부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상임이사 양순임씨(47)도 『유골송환 사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확한 실태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 각지역과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아버지와 삼촌 형님들이 끌려갔던 모든 전쟁터를 샅샅이 뒤져 억울한 죽음이 얼마이고 그 주검들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를 파헤쳐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호적정리도 가능하고 제사도 받들 것인데 반세기 가까이 「행방불명」으로 처리돼 있으니 이런 법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느냐고 유족들은 한탄한다. 실제로 유족회 회원 5천여명의 회원카드 비고란에는 「생사확인요」 「유해반환요구」 「보상못받아 억울」 등 피맺힌 비망록이 적혀있다.〈문창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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