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가… 56년 민중혁명 때 반소활동 앞장/경제부흥등 현안불구 연정구성 무난 점쳐공산화 43년만에 역사적인 출범을 하는 헝가리 민선정부는 요제프ㆍ안탈민주포럼(MDF)당수가 이끌어 갈 것이 확실시 된다. 그의 첫 민선 총리직 취임은 「자유」 「박애」의 전통이 강한 중부유럽의 회복을 주창하는 한 인텔리겐챠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는 셈멜바이즈 의학사 박물관 관장인 그가 극작가 출신의 하벨 체코대통령,언론인 출신의 마조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더불어 민족주의적 탈공산화 혁명을 리드하는 중부 유럽의 「인텔리겐챠 트로이카」를 형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58회 생일이기도 한 8일의 결선총선에서 압승을 확인한 안탈은 헝가리의 유럽공동체(EC) 정회원가입,시장경제체제 도입등 서구민주주의제 채택을 선언했다. 그러나 「승리의 쾌감에 눈이 멀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지적대로 그는 40여년 간 굳어진 두터운 공산화 사회의 껍질을 벗겨낼 무거운 책임을 걸머졌다.
우선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헝가리인들의 결정이 「마르크스 대신 마르크화」로 표현되는 것처럼 헝가리의 경제 상황전도는 결코 밝지않다. 인구 비례면에서 동구권 최고액인 2백10억달러에 이르는 외채부담과 연간 20%를 상회하는 고인플레,게다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실업률 증가와 기업도산 등 숱한 난관이 중첩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념의 굽힘없이 살아온 안탈의 생애와 동구권에서 유일하게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룩해낸 헝가리의 잠재역량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많다.
의학사가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을 택한 동기가 『마르크스를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애국적 민족주의 자유주의 신념에는 굽힘이 없었다.
공산화 이전 짧은 기간 집권한 소지주당 정권에서 부흥장관을 지낸 부친 밑에서 보수적 가톨릭전통에 따라 자라난 안탈은 부다페스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주로 교직생활을 했다. 56년 스탈린주의에 맞서 봉기한 헝가리 민중혁명시 중등교사의 몸으로 해체된 소지주당 재건에 앞서다 소련군에 체포돼 해직당했다. 카다르의 개혁정권이 등장한후 74년 복직됐으나 탄압이 계속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다.
그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은 지난해 10월. 지식인 작가층이 주축이돼 개혁을 촉진시켜온 MDF의 당수로 선출되면서부터. 과묵하지만 현실을 꿰뚫는 날카로운 판단이 정부 재야간의 원탁회담에서 탁월하게 발휘돼 동료들의 신망을 쌓았다.
이같은 배경으로 중도우파 정당인 소지주당 기독민주인민당 모두로부터 당수제의를 받았을 정도여서 안탈이 연정을 구성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윤석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