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의 스탈린격하 작업과 마찬가지로 지금 유고에서는 티토 전대통령에 대한 격하운동,파나마에서는 토리호스 장군에 대한 격하운동이 한창이다. 두사람 다 집권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는 점에서 사후 10년을 전후해 일어나고 있는 격하운동은 역사적 재평가의 의미를 떠나 권력무상을 짙게 느끼게 한다.【편집자주】◎민족주의 지도자들 격하 수난/독재자 낙인ㆍ업적 평가절하/유고 “비동맹외교 주창 「스탈린주의」 모방”/파나마 노리에가 후원에 초점 벽화도 철거
○깨지는 티토신화
유고독립의 영웅이자 반 스탈린 독자노선의 창시자이며 비동맹회의의 창설자로 유고의 국부로 추앙받던 티토의 격하운동이 심상치 않은 기세로 번지고 있다.
35년 동안 티토를 신처럼 숭배해왔던 유고 국민들은 그의 사후10년을 맞아 연일 새롭게 폭로되는 숨겨졌던 비리를 접하며 점차 「티토신화」의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다.
티토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던 도시들이 다투어 옛 이름을 되찾고 있는 것이 티토의 우상에 금이가고 있음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티토가 격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생전에 그가 누렸던 사치한 생활이 알려져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여론을 자극하면서 부터 였다. 현재 유고 정부는 호화객차 20량과 기관차 2대가 딸린 4천만 달러상당의 티토 개인전용열차 처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명 「청색기차」로 불리는 이 열차는 한해 유지비만 15만 달러 정도에 달해 매각을 서두르고 있지만 워낙 비싸 사겠다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다뉴브강의 호화요트,전국 각지의 궁전같은 별장 등 여러가지 유산들도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최근엔 심지어 티토가 정식 결혼만 3차례 이상을 했으며 숨겨놓은 자식도 여럿이라는 등 문란했던 사생활을 파헤친 잡지마저 등장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티토 격하운동은 티토의 사생활에 관한 추문폭로에만 국한돼 있는게 아니라는게 그 심각성이 있다.
전설적인 반나치 게릴라 활동,영웅적인 반스탈린ㆍ반소독자노선추구,반식민주의ㆍ반군사블록의 비동맹외교노선 주창 등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작업의 초점은 티토의 독자적인 「티토주의」가 「스틸린주의」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의 모방 또는 변종 이었다는 해석에 모아지고 있다. 지난해 출간된 일련의 비판서들은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티토가 얼마나 충실한 스탈린주의자 였던가를 입증하려 하고 있다. 이책들에 의하면 티토는 1939년 스탈린의 지시로 8백명에 이르는 유고공산당내 핵심단원을 숙청한 것으로 돼있다.
「티토: 언제ㆍ어떻게ㆍ왜」의 저자인 페로ㆍ시믹은 『티토 자신은 당시의 숙청이 후일 유고 공산당의 독립을 위한 사전 정비였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스스로 발칸반도의 스탈린이 되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시믹은 티토가 자신의 과거경력을 날조한 몇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스탈린식 개인우상화를 획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례로 대외선전 자료에는 대숙청전인 37년에 티토가 유고 공산당 서기장이 된 것으로 돼있지만 발표가 금지돼온 극비문서엔 대숙청이 끝난 40년에 비로소 서기장에 오른 것으로 돼있다. 이밖에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티토가 참여했다는 주장도 거짓으로 밝혀졌다.
48년 티토가 스탈린과 반목,유고가 코민포름으로부터 축출된 원인도 티토의 영도력 보다는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비롯됐다고 비판가들은 말한다. 유격대 활동을 통해 자력으로 조국을 해방시켰다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티토는 2차대전후 소련을 제치고 불가리아 루마리아와 우호협력을 체결하는 등 발칸연방을 구상했다. 이로인해 결국 스탈린과 등지게 됐지만 티토스탈린 불화는 「동색의 갈등」이라는 분석이다. 스탈린이 견제하지 않았으면 티토는 발칸반도의 패권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티토는 개인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6년 당시 부통령이자 그의 핵심측근이었던 랑코비치까지 도청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고 「자비없는 관용」의 공동집필자인 요반ㆍ케자르는 주장한다.
또 최근엔 2차대전후 유고전역에서 가해진 혹독한 인권탄압사례와 7천여명에 이르는 남녀정치범들의 고문ㆍ투옥사실이 새삼 여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티토가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나치의 게슈타포,스탈린의 KGB같은 비밀경찰에 의존했다는 비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토가 스탈린처럼 하루아침에 격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도 유력하다. 티토의 초상화는 여전히 각 관공서 사무실마다 걸려있고 티토의 이름을 딴 거리도 유고전역에 아직 셀 수 없이 많이 남아 있다. 그만큼 티토의 발자취가 깊고 넓은 탓일 것이다.
○반토리호스 팽배
지난 77년 미국과 파나마운하 반환협정을 체결,파나마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아온 오마르 토리호스ㆍ헤레라장군(29∼81년)에 대한 격하작업이 최근 친미 엔다라정권의 주도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토리호스 장군은 68년 쿠데타로 집권,81년 불의의 비행기사고로 사망할때 까지 13년간 파나마의 최고지도자 (Maximun Chief)로 군림해 왔던 인물이다.
그는 파나마운하 반환협정체결을 통해 파나마 국민의 자존심을 드높였을 뿐만아니라, 집권기간 동안 빈민계층을 위한 의료 교육 주택정책을 실시,대다수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왔다. 물로 토리호스도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투옥하거나 국외추방 했으며,군부의 규모와 역할을 정도이상으로 증대시켰다. 심지어 그는 정부의 「정치지도 역할」 조항을 헌법에 삽입 시키기 까지 했다.
엔다라 정권이 벌이고 있는 반토리호스 캠페인은 이러한 토리호스 자신의 강권통치자체의 문제점보다는 그가 지난해 12월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된 노리에가를 발탁하고 후원했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토리호스는 노리에가의 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리에가를 파나마군 정보책임자로 발탁했을 뿐아니라 사석에서는 「나의 작은 악당」(My little gangster)이라 부르며 총애 했었다.
「추악한」 독재자로 낙인 찍혀버린 노리에가나 그를 실권자로 만들어준 토리호스는 한통속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엔다라 정권의 논리이다.
엔다라 정권은 집권이후 토리호스 격하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왔다. 국민학교 교과서를 개정,토리호스와 노리에가의 21년 집권기간을 군부독재 시절로 뭉뚱그려 놓았고,토리호스 공항으로 불리던 파나마 국제공항을 토쿠멘 공항으로 개칭했다.
파나마시티의 최대공원인 토리호스 공원도 토리호스 통치시절 살해당한 반체제인사 헥토르ㆍ가예고스 목사의 이름을 따 가예고스 공원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격하운동의 여파는 토리호스의 출생지인 산티아 고드베라구아스시에 까지 미쳤다. 그의 생가부근에 있는 시립야구장의 이름에서 토리호스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다.
토리호스 격하작업이 별다른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키지 않자 파나마의회는 의사당앞에 있는 토리호스 벽화를 제거하는 문제까지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파나마운하 반환협정체결을 기념한 이 대형벽화는 파나마 모자를 쓴 토리호스 장군이 파나마 국민을 이끌고 운하로 향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엔다라 정권의 지지자들은 군사정권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이 벽화를 페인트로 뒤덮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리에가의 폭정이 토리호스에 대한 민중들의 존경심을 급속도로 상실케한 것도 사실이다. 미군침공당시 토리호스의 기념관이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약탈돼 많은 기념물이 손실됐던 것도 이를 증명해 준다.
이처럼 반토리호스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토리호스의 유가족들은 파나마 시티에 소재한 무덤으로 부터 그의 유골을 옮겨 버렸다. 경비병이 철수,유골이 도난당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토리호스에 대한 격하 작업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토리호스가 국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군사독재정권을 출범시킨 「죄과」가 있는 이상 그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토리호스와 노리에가의 구별을 강조하는 그의 추종자들은 『파나마에 미군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희석 시키려는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농간에 불과할 뿐』이라고 개탄한다. 이들은 파나마 공화국이 독립한 이래 백인 추종자들이 결코 해내지 못했던 일을 불과 10년안에 이루어낸 「혼혈아」 토리호스와 그의 업적을 현재의 친미 과두집권층들이 결코 그대로 놔두지 않으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자조한다.
노리에가의 몰락에 대해서는 「강대국의 횡포」 또는 「폭정의 사필귀정」이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토리호스의 격하운동과 노리에가의 몰락을 한데 묶어 생각하면 중남미 소국 민족주의의 좌절이란 측면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김현수ㆍ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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