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은 지금 대구서갑구와 충북 진천ㆍ음성의 보궐선거 결과가 던진 충격에 시달리고 있다.민정 민주 공화등 3당이 하나로 통합되던 두세달전만해도 국민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서도 신당에 기대를 걸었었는데 어느새 몰라보게 민심이 떠나버렸는지 민자당으로서는 딱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
이번에 민자당이 받은 쇼크는 제5공화국이래 집권여당이 받은 3번째의 선거 쇼크이다.
첫번째 쇼크는 신야당의 돌풍이 휘몰아쳤던 85년의 2ㆍ12총선때 민정당이 받은것이었다. 당시 12대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씨등 정치활동규제에서 금방 풀려난 야당인사들로 구성된 신민당이 예상을깨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압승을 거두었던것이다.
이바람에 11대국회에서 제도야당이라고 불려졌던 민한당이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민정당이 여전히 다수당의 위치는 유지했지만 대도시에서 참패의 쓴잔을 들어야 했다. 신민당이 민한당을 흡수하여 거대야당으로 등장하면서 힘을 과시하자 민정당이 정국주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것은 물론이다.
두번째 쇼크는 88년의 4ㆍ26총선에서 역시 민정당이 받은 것이다. 1구2인선출의 여야동반선거제를 1구1인선출의 소선거구로 제도를 바꿔 처음 실시한 13대총선에서 민정당은 원내 제1당의 자리는 지켰으나 야당의 전체의석에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4당체제와 여소야대로 국회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틀거린 것이 바로 작년말까지의 일이었다.
민자당측의 설명을 빌면 이런 비정상적인 정국운영을 바로 잡기위해 나타난 「정치혁명」이 바로 3당합당이었다.
그러나 합당조치는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지도자들 몇몇이서 결정한 「야합」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보수대연합에 의한 정국의 안정적 운영이라는 대의명분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면서 처음에는 반수이상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것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지지율은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김영삼최고위원이 소련을 방문해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등 새 바람을 일으켜 민자당의 입지를 강화하는듯 했으나 외교활동으로 국내 정책의 실패를 만회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합당심판의 보궐선거는 민자당의 참패라는 쇼크를 안겨주고 만 것이다.
만일 이번 선거가 총선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면 민자당으로서는 아찔한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민정당이 합당을 하지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선거를 했더라면 어떤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것은 민자당의 패배가 그만큼 아프기 때문이다.
85년의 2.12총선쇼크는 대대적인 체제개편으로 대처했고 88년 4.26총선쇼크역시 당장은 일대 인사개편으로,나중에는 야당을 흡수통합하는 정계개편으로 근본대책을 마련하느라고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셈이다. 3번째 맞는 이번 선거쇼크는 첫번째 두번째의 쇼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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