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의 한/강제징용 4만명 일서 귀환거부 방치/생이별 국내 50만 가족과 반세기 피울음/최근 변호사 모임서 배상청구 움직임 사할린 억류동포들의 기막힌 반세기는 일본의 전후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또하나의 사례이다. 소련의 개방정책으로 일시귀국이나 제한적인 영주귀국의 길은 열렸으나 4만명이 넘는 당사자들이나 국내의 수십만 잔류가족들은 「원상회복」의 길을 찾을 수가 없다.한국의 변호사 거의 전부가 가입하다 시피한 사할린 동포 법률구조회(회장 지익표)가 그동안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들이 해오던 「사할린 잔류자 귀환청구 소송」대신에 「보상 및 배상청구 소송」을 벌이기로 결정,국내기초 조사및 사할린 현지조사준비에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종전당시 사할린 거주 한국인수는 4만3천명선. 현재는 2.3세의 출생으로 그수가 6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계된다.
46년 한국거류민회의 조사에 의하면 남한출신 95% 북한출신 5% 였는데,48년 소련당국의 국적취득 강요시,65%가 북한국적,25%가 소련국적을 취득했다.
10%는 북한이나 소련국적을 취득했다가 고향땅으로 못돌아갈 것을 우려,무국적자로 남았다.
이들의 사할린 거주경위는 일제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살길을 찾아 나선 경우도 많았던 일본본토 거주 한국인들과는 또 달랐다. 거의 전부가 강제 노동현장에 끌려온 탄광 노무자였고,극히 일부가 소식이 끊긴 남편과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가족들.
이들 한국인 4만3천명을 포함,종전시 사할린 거주 「일본인국적자」는 36만명이었다.
46년12월 미소간의 협정에 따라 사할린 거주 일본인들의 송환이 시작돼 29만여명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유독 한국인만은 귀환이 거부된채 철저히 방치됐다. 이는 당시 일본정부가 일본호적에 입적돼있는 일본인만을 협정상 송환대상자로 인정하고 일본국내법상 조선인 신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귀환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포로 감시원으로 끌려갔다 전범이 된 한국인들이 미일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일본국적을 상실한 뒤에도 판결시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석방을 거부했던 것과는 정반대 논리였다.
이어 56년 일소 국교회복에 따라 그후 몇년간 종전직후의 송환에서 빠졌던 일본인 8백50여명이 귀환했다.
이때 종전전 일본 여성과 결혼했던 한국인 남자와 가족 1천8백40여명이 함께 귀환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사할린을 빠져나온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62년 소련당국이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의 출국요구에 대해 『일본이 입국을 허용한다면 소련은 출국을 허용한다』고 답변했을 때도 일본정부는 『샌프란시스코조약(52년)으로 한국인들이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여권발급을 거부했다. 또 영주목적의 일본으로의 도항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종전후 사할린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일본국적을 상실한 일본여성 2명은 「일본국적자」로 인정,일단 귀환을 실현시킨 후 일본 국적을 박탈하는 편법까지 동원했었다.
62년당시 「사할린 귀환 재일한국인회」로 송부된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의 귀환신청서에 의하면 한국 및 일본으로의 귀환희망자는 모두 1천7백49세대 6천9백24명에 이르렀다.
75년12월 일본인 변호사 17명이 사할린 거주 한국인 3명을 원고로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귀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무려 15년을 끌다가 원고중 2명이 죽고 한명이 한국으로 귀환해 1심판결조차 없이 지난해 6월 종료돼 버렸다.
소련의 개방정책과 88올림픽을 계기로 이젠 일본에서의 가족상봉과 일시 본국방문에 이어 영주귀국자도 나오게 됐다. 89년4월에는 한국의 잔류가족이 처음으로 사할린을 방문하기도 했다.
뒤늦게 귀환의 길이 열렸다고 이들이 원상회복상태가 됐으며 일본의 책임이 면해진 것인가. 현재 사할린 거주 한국인의 국내가족은 50만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끌려간 땅에서 고향의 가족을 그리다 죽어갔거나,돌아오고 싶어도 의탁할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그들의 피맺힌 반세기는 누가 보상 할 것인가. 가장을 잃고 어렵게 살아온 국내 잔류가족들의 고생은 어떻게 보상될 것인가.
이들 잔류가족들은 일본은 마땅히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의 원상회복 불이행에 대한 「배상책임」과 그동안의 피해에 대한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피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야나기ㆍ겐이치(유건일) 신임 주한일본대사가 최근 일정부의 「예산조치」 운운하며 생색을 낸 돈이라는 것은 가족상봉을 위한 일본방문 및 일시 귀국시의 여비 보조비이다. 87년 처음 2백27만엔이 책정됐고 지난해엔 5천8백만엔 이었다. 그 돈으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 처럼 한 말을 듣고 국내의 잔류 가족들은 또 한번 뻔뻔한 일본정부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최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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