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의 티토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대통령은 동구공산권의 이단아,독불장군등으로 불리었다.독자노선 선언의 선후배인 이들은 비슷한점이 많다. 고집불통의 독재자에다 공산주의자답지 않게 유별나게 사치스러운것도 그렇지만 나라의 내정과 경제는 형편없는데도 세계분쟁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거액을 낭비하며 뻔질나게 각국을 드나든것도 비슷하다.
이들이 한동안 김일성의 대변자가 되어 한국을 괴롭혔던적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유신독재인권탄압과 관련,박정희정권과 무척 사이가 나빴었다. 카터대통령은 박정권도 견제하고 또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주한미군철수를 실현시키기위해 북한 카드를 활용하려했다. 당시 북한은 미국을 침략자로 규탄,미군철수를 요구하면서도 미국과의 교류와 협력을 갈망했다. 북한역시 카터,박 두정권의 불화의 틈을 이용하려한 것이다.
77년9월 카터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는 티토편에 김일성에게 북한의자세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즈음 한반도문제논의를 위한 남북한과 미국의 「3자회담안」이 갑자기 부각된 것이다. 남북한간의 직접협상을 제기해온 한국측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안이었다. 78년봄부터는 차우셰스쿠가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며 3자회담안을 역설하는한편 김일성의 메시지를 카터에게 전하기도 했다. 김은 메시지에서 『미군철수와 함께 북한정권을 인정하면 3자회담은 물론 한국과 연방제통일안도 논의할수있다』고 속셈을 드러냈다. 당시 카터티토차우셰스쿠가 우리국가 장래를 가늠할 3자회담안을 갖고 쑥덕거릴때 우리정부는 완전히 소외된채 구경꾼이 돼야만 했다. 다행히 카터의 낙선으로 철군계획과 3자회담안이 무산되고 말았다.
티토와 차우셰스쿠가 사망하고 뜻밖의 민주화열풍으로 동구각국의 요청에 따라 우리와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지난달하순 현지를 순방한 최호중외무장관에 대해 각국은 반공적자세까지 보이며 한국의 자본과 기술지원을 요청했다. 새로운 외교환경이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수있는지를 침착하게 숙고할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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