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일,한국인피해 철저히 은닉(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3)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일,한국인피해 철저히 은닉(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3)

입력
1990.04.01 00:00
0 0

◎“태평양전쟁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패색 짙자 명부 소각… 공개자료는 축소/징병·징용·사망자수 발표기관마다 달라/최소 백70만 강제동원태평양전쟁기간중 한국인이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상황은 어떤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군인 또는 군속으로 전선에 끌려갔으며 민간인 신분으로 각종 군수산업현장이나 탄광등에 끌려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사망자와 부상자및 실종자는 몇명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불명」이다.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들이 철저히 진상을 은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들은 징병 또는 징용자명부 등을 철저히 소각했고,전후에도 근거가 될만한 자료들은 깊숙히 감추었으며,공개하지 않을 수 없는 자료는 가능한 한 사실을 축소해서 내놓았다.

「종군위안부」란 책을 쓴 일본인 천전하광씨에 의하면 조선총독부는 8·15직전 강제연행자의 명부등을 소각해 버렸다. 그 사본 1통이 총독부 동경사무소에 보관됐다가 조선은행 동경지점으로 이관됐는데 일본 채권신용은행으로 변한 이 은행은 지난 80년 천전씨의 열람요구를 거부했다.

지금까지의 국내외 학자들과 재일한국인 거류민단들이 입수한 자료를 근거로 파악해 놓은 강제연행자및 피해자수가 제각각인것도 그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부터 태평양전쟁에 패한 45년까지 강제연행한 징용자 총수에 대해 일본후생성은 66만7천6백84명,공안조사청은 72만4천7백87명이라고 발표했고,조선경제통계요람에는 1백11만9천32명으로 돼있다.

군인·군속에 대한 자료는 징용자 숫자처럼 큰 차이는 없지만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총독부가 1944년 일본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1938년부터 패전 전해인 44년까지 지원병및 징병제로 징집한 한국출신 군인은 22만9천9백14명이다. 또 일본대장성이 47년에 조사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군용원 또는 군속으로 끌려간 사람은 14만5천10명이다. 45년도의 현역병징병자수가 빠진 총독부자료의 현역병 인원과 대장성자료의 군속수를 합치면 직접전쟁에 동원된 사람은 37만4천9백24명.

이밖에 여자정신대 남방파견보국대 학도근로보국대 해군작업애국단등의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몰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자료조차 찾을 수 없다. 정신대에 대해서는 약 20만명(김대상저·일제하강제인력수탈사)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8만∼10만명(박경식저·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축소된 기록을 근거로 하더라도 최소한 1백7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강제연행돼 전쟁터나 군수공장등에 끌려간 셈이다.

사망·실종·부상등 직접적인 인명피해의 진상은 더욱 은폐돼 있다. 47년의 대장성자료에는 24만여명의 군인·군속 가운데 2만2천1백82명이 사망했고,22만1백59명이 「복원」(귀환)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88년에 발행된 일본정부의 관보에는 사망자수를 2만1천9백19명,복원자수를 22만81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축소된 군인·군속의 총수가 37만명이 넘는데도 두자료는 그것을 24만여명으로 줄였고 사망자수도 서로 달라 믿기가 어렵다.

일본후생성에 4만명의 사망자명단이 보관돼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나,군인·군속가운데 행방불명자가 15만명정도라는 추산은 이같은 의문을 더욱 굳혀주는 것들이다.

징용자나 정신대의 사망자수는 더욱 짙은 베일속에 감춰져있다. 국내외의 어느 자료에도 1백30만명이 넘는 이들의 인명피해는 언급돼 있지않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이나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전장이나 탄광 비행장 댐건설현장등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갖가지 사고등으로 사망또는 부상한 징용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국이 제작한 기록영화 「유황도」의 내레이션에는 남양제도의 전투에서 구출된 한국출신 노무자수가 2천명에 불과하다는 부분이 있다. 동원된 노무자 총인원이 몇명인지 밝히지 않고 있어 사망·실종률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군인·군속과는 별도로 군부란 이름으로 전선에 끌려간 사람이 15만명이나 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가 짐작할 수 있다.

징용자 가족 주흥배씨(62·경기 부천시 괴안동 주공아파트)는 『43년 야마구치(산구)현의 탄광에 끌려간 매부의 소식이 끊겨 누님이 그곳으로 찾아갔는데 누님마저 아직껏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전쟁터가 아닌곳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가운데 생사불명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만큼 많다. 일본이 발벗고 나서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는한 군인·군속이외의 연행자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규명할 수가 없다. 전후처리가 정확한 피해 규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문창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