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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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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1)

입력
1990.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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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쓴 전범:상/한국인 백48명… 23명은 처형돼/전쟁중에 강제징집 「포로감시」 악역맡아/항변 한번 못하고 수인생활… 일선 발뺌만일본의 전후처리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광복 45년의 해에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한국인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목소리가 새삼스레 높아가고,최근 일본의 지식인 61명이 일본국회에 대한 공식 사과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인 피해자들의 집단행동을 계기로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피해진상을 밝히는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도대체 한국인이 어떻게 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범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장기투옥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42년 동남아지역 연합군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끌려갔다가 종전후 BㆍC급 전범으로 몰려 형사처벌을 받은 한국출신 군속들의 모임인 동진회(회장 문태복)는 피울음같은 항변을 30년이 넘도록 계속해왔으나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못들은 체하고 있다.

일본을 위해 일하다가 전범이 됐다고 해서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일본땅에 내팽개쳐진 동진회 회원은 생존자 36명과 유족12세대를 합쳐 38세대로 확인되고 있다. 그동안 일본정부를 상대로 석방청구소송과 보상요구등 메아리없는 외침을 계속해오다 다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해 놓고 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ㆍ영ㆍ불 등 연합국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 그 책임을 물었다. 전범은 AㆍBㆍC급으로 나뉘어 재판을 받았는데,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집행된 일본인은 7명에 불과했지만,BㆍC급으로 몰려 처형된 한국인은 23명이나 됐다.

BㆍC급은 특정 지역에서 통상적 전쟁범죄를 범해 각국의 군사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다.

당시 49개소에 설치된 각국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범은 5천7백여명으로 집계돼 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인 1백48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 1백48명중 일본군 제14방면군 병참총감이었던 홍사익중장(사형)과 강제지원병 2명 등(유기형) 군인 3명과 중국에서 통역으로 징용된 16명(사형 8명 징역형 8명)을 제외한 1백29명이 포로감시원으로 징집된 군속들. 이들중 14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이국땅에서 처형됐고 1백15명이 10년이상의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42년6월 조선땅에서 모집이란 미명하에 사실상 강제 징집된 소위 포로감시원은 모두 3천여명.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20년으로 감형돼 싱가포르 창기형무소와 일본 스가모 형무소를 거쳐 56년 출소한 이학렬씨(65ㆍ히바리카오카 시)는 사실상 강제로 끌려가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썼다고 말했다. 그는 17세 때 「남방군 파견군속」 모집에 응했다. 판임관대우에다 당시로는 큰 돈인 50원이란 급료도 솔깃했지만 전남 보성에서 보통학교를 나와 집안일을 돕던 그로서는 끌려갈 게 뻔한 징병이나 징용을 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면에 할당된 징용대상자 명부에서 빠져나가려면 그길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강제모집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모집된 3천여명의 청년들은 42년 6월12일부터 부산 서면에 있던 노구치(야구) 부대에서 2개월간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된다. 당시의 훈련에 대해 동진회 회원들은 『총쏘는 법과 상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만을 배웠을 뿐 포로처우등에 관한 제네바국제조약 내용같은 것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오히려 포로가 되는 것이 황국신민으로서 최고의 수치라는 『전진훈』이 이들에게 주입됐고,이는 훗날 이들을 비운으로 몰고 가는 한 요인이 됐다.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20세 전후의 한국청년 3천명은 2개월후인 8월19일 9척의 선단에 나누어 타고 2주간의 항해끝에 태국(8백명) 말레이시아(8백명) 자바지역(1천4백명)에 분산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속됐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정글의 늪속에서 식량의 절대부족과 의약품의 결핍이란 극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혹독한 지시아래 포로들을 독려,철도와 비행장 항만 등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포로들의 엄청난 사망은 예기돼 있었고,그 책임은 후에 고스란히 포로들과 밤낮으로 피부를 맞대고 있던 포로감시원에 돌아왔다. 태국지역의 연합군 포로 5만5천명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진 태국­버마간 4백14.19㎞의 태면철도 건설에 동원됐다. 영ㆍ인 연합군을 격퇴하기 위해 당초 5년여로 계획했던 공기를 1년2개월로 단축시켜 완공시킨 이 공사에서만 연합군 포로 1만3천명이 숨져갔다.

포로사망률 25%,현지인노무자 사망률 50%라는 수치가 말하듯 이 공사에는 「침목 1개에 사망자 1명」 「죽음의 철로」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다. 이 죽음의 현장에서 포로감시원의 생활조건은 포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철도공사 책임을 맡은 일본군 철도대와 포로수용소 장교및 하사관들은 포로 한사람이라도 더 공사에 투입하려고 눈에 불을 켰고,감시원들은 중환자들을 노역에서 면제시키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동진회 회장 문씨는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포로들의 실정을 호소했다가 목도로 두들겨 맞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 연합군의 전범 재판이 시작되자 한국인 감시원들 상당수가 포로학대 혐의를 받게 됐다. 일본군은 포로학대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한 데다 포로들과 온종일 접촉한 사람들은 대개가 한국인 감시원들이었던 것이다.

재판이란 것은 「뺨 한대 때린 죄가 징역10년」이란 식의 인민재판형식이었으므로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형을 면한 사람들은 싱가포르 창기형무소에서 일본 동경 스가모(소압) 형무소로 이감돼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50년대에 대부분 석방됐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전범자들에게는 갖가지 원호법을 적용시켜 보상금을 주고 생계지원비까지 지급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인 전범출신자들의 보상요구는 철저히 외면해왔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때문에 전범이란 오명을 쓴 식민지 사람들의 피맺힌 목소리를 외면하면서도 일본은 전후처리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동진회 사람들은 묻고 있다.【동경=최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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