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아끼고 존중할줄 알아야 성숙한 사회라고 할 만하다. 인재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는다. 거목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과 자양의 공급이라는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한다.우리 사회는 사람을 너무 헤프게 쓰는 풍토에 젖어 있다. 여러 차례의 정변,격동기를 거치면서 인재의 부침이 무상하다. 하루아침에 끌어모으고 하루아침에 쓸어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부조리가 생기고 쓸만하다는 사람도 미처 역량을 펴볼사이도 없이 때묻은 얼굴로 처져 버려지기가 일쑤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인재의 빈곤을 한탄하게 되고만다.
빈곤의 책임은 사회풍토나 분위기에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써 발탁된 사람이 양식과 자중자애의 자세를 잃고 현실과 쉽게 타협하고 때로는 영합한 것이 불행한 단면의 출발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이나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오면 대개는 「어용과 오염」의 지탄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버리는 현실을 우리는 늘 안타깝게 보아온 것이다.
쓸만한 인재가 제구실을 다시 펴지못하고 사람의 축적된 지식이나 능력을 연속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원인은 결국 우리 사회풍토와 거기에 관련된 개인의 처신,두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척박한 환경에선 사람이 곧 자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오늘 이만한 삶의 기반을 다진 것도 우리의 두뇌와 근로의 공로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줄 안다. 이 사실은 정설이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우리의 풍토,특히 관료사회는 사람을 소모적으로만 이용하려든다. 참여한 인간의 창의력이나 사회적 모순의 벽을 뚫으려는 의지를 기를 쓰고 꺽어내린다. 그래서 결국 정권유지의 겉치레나 전문지식의 공급자 구실만으로 수명을 다하고 「정권에 오염」이란 낙인이 찍힌 채 폐기당함이 지금까지의 병폐가 아니었던가.
정치나 공직사회에서의 물갈이는 필요한 일이다. 깨끗한 산소공급이 인체에 필수적이듯 신선한 인재의 순환은 시기에 알맞게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의 물갈이는 정상적 순환이 아니고 새로운 등장과 동시에 이같이 인력의 폐기처분으로 통한다. 이렇게 혼탁한 분위기가 지속되는한 인력의 고갈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우리 사회가 활력있는 발전을 꾀하려면 인재의 양성과 발탁,그리고 축적된 전문인력의 활용과 확산과 분야간의 교류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더구나 있는 인력자원의 활용,재활용은 최대로 문호개방을 시도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려면 참여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회나 우리의 통념과 상식이라는 공통의 기준을 존중하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신선하고 발랄한 인재들에겐 무엇보다 자중자애의 책임의식을 지녀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뜻을 권하고 싶다. 출세주의는 끝내 사람을 망치고 만다.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추구하고,요행스럽게 그런 위치에 올랐다고 좌고우면하며 공정성과 청렴성을 등한히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결말은 뻔하다. 어용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초야에 묻히고 만다. 전문성과 능력을 받아주려 해도 너무나도 못쓰게 된 경우가 안타까울 만큼 많다.
분야간의 인력교류는 선진사회에서도 흔하다. 학자가 정치에 입문하고 공직을 맡는가 하면 실업인도 변신해 재능을 나타낸다. 그들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자연스럽게 강단이나 원위치로 돌아간다. 능력이 있는한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도 공직과 학문의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업적을 남긴 퇴계와 율곡과 같은 선현들이 있다. 그들은 공직에서 못다한 자기개발을 학문에서 찾아내고 열매를 거두었다. 선비정신의 결실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사람을 아끼고 바로 쓸줄 아는 사회가 건전하고 발전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능력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학이고 인적 자원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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