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고생 많았느냐”/“이젠 죽어도 여한없어”/손씨 기자회견중 북의식 발언도【동경=정훈특파원】 6ㆍ25의 와중에서 신혼의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낸뒤 40년을 홀로 살아온 김선순씨(62ㆍ부산 동래구 칠산동 195)가 17일 하오2시 김해공항을 출발,하오8시50분 동경팔레스호텔에서 남편 손영종씨(63ㆍ북한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실장)와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어머니보다 하루먼저 동경에 도착,생전처음 부자상봉을 한 아들 손경한씨(39ㆍ변호사ㆍ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양아파트 3동1401호)와 함께 그리던 남편을 만난 김씨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없다』며 눈물지었다.
김씨가 부산에서 함께 온 시아주버니 영춘씨(65) 시누이 영숙(60) 영부씨(58) 등과 함께 팔레스호텔2층 아이스룸에 들어서자 10여분전에 도착,이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손씨는 부인과 아들을 얼싸안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눈물로 지난 세월을 용서비는 듯 했다.
김씨가 안개꽃과 붓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남편에게 안겨주며 『당신을 위해 고향인 부산에서 가져온 꽃』이라고 말하자 손씨는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손씨의 형 영춘씨가 『이놈아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통곡하자 손씨는 『형님,정말기적입니다』라고 울먹였고 영숙씨 등 두 여동생이 『오빠,우리들이 누구인줄 아느냐』고 울부짖자 손씨는 『어떻게 혈육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시종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 40년만의 재회가족들은 만남을 주선한 요미우리(도매) 신문사의 배려로 20분동안 가족들만의 시간을 가진후 하오9시10분부터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동경주재 한국특파원단을 비롯,일본의 전신문ㆍTV방송,조총련통신인 조선통신기자도 참석,분단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했는데 손씨는 막상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냉정을 회복,북한을 의식하는 발언을 많이해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40년만에 만난 소감은.
▲김씨=청년시절 건강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두볼이 튀어나온 여윈모습이어서 가슴이 아픕니다. 시어머니 생전에 이같은 재회가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어머니는 북녘으로 간 아들을 그리다 한을 못풀고 87년8월 돌아가셨읍니다. 나도 이젠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손씨=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무척 반갑습니다. 그러나 우리가족의 분단은 역사가 만든것이기 때문에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집사람이나 아들도 그렇게 이해해 줄것으로 생각합니다.
헤어지게된 경위는
▲김씨=6ㆍ25가 한창이던 50년10월 남편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사학과 재학중이었는데 학교에 간다며 나간후 그대로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손씨=학교에서 북으로가는 친구들이 많아 「친구따라 강남간다」말대로 떠난것이 40년이 흘렀습니다.
북쪽에서의 생활은.
▲손씨=북반부에서 역사공부를 계속,교수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2남4녀를 두었는데 6남매를 모두 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고고학을,둘째아들은 의학을 전공했고,첫째딸은 약학,둘째딸은 경제,셋째딸은 음악,넷째딸은 과학을 각각 전공했읍니다. 아마 6남매 모두를 대학졸업시킨 집안은 어느사회에서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이부분에서 북한을 의식하는 듯 했다)
(손씨에게) 아드님이 홀어머니슬하에서 열심히 공부,한국에서는 지도적위치인 변호사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견하지 않습니까.
▲손씨=나는 변호사가 사회의 지도적위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못해 미안하긴하지만 북반부에도 자녀들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손씨=우리는(북한) 전면개방을 요구합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기자여러분들이 더 잘알것이 아닙니까.
기자회견이 끝나자 손씨는 부인과 아들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는데 손씨옆에는 조총련 국제국부장인 이달국과 감시원인듯한 건장한 체격의 청년1명이 항상 따라붙었다. 손씨는 부인과 함께 걸으면서 『고향의 꽃내음은 예전이나 이제나 향기롭다』고 다정한 말을 건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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